[시대藝인] "하루 15시간씩.." 집을 '그었다' 도시가 될 때까지
선 그리기 위해 풍경 고르고 사진 촬영
투시법 따라 라인 잡고 소실점 찾아가
0.6mm 세필로 수십만번 빽빽하게 그은
뉴욕·파리 등 세계곳곳 풍경 23점 걸어
"호흡 붓끝에 심어..세상 기품 담는다"
그래선가. 평일 오후 이곳이 북적인다. 이미 중독됐거나 중독될 준비가 된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고 나는 중이다. 여기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갤러리조은, 작가 우병출(52)이 개인전 ‘원 데이’(One Day)를 열고 있는 곳이다.
작가는 ‘선’을 긋는다. 그것도 수만, 수십만번의 선을 세밀하게, 섬세하게, 빽빽하게, 정갈하게. 한마디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긋는 거다. 그 선과 선으로 집을 짓고 아파트를 들이고 빌딩을 올리고 도시를 세운다. 그렇게 세상을 빚는 거다. 최근까지 많이도 쌓았다.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 분수대 앞(2021), 프랑스 파리의 마레지구(2021), 루브르박물관 길(2020), 라파예트백화점 전망대(2021), 또 시테섬 퐁네프다리(2021)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뢰머광장(2021)과 홍콩 마천루(2020)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광경도. 두루 세계를 거쳐선 한국땅으로 돌아왔다. 잠실 롯데타워 전망대의 노을(2019)과 한강 유원지(2019), 그러곤 화룡점정을 서울 북악스카이웨이(2021)에서 찍었다. 선 하나씩 긋고 그어 폭 5m에 달하는 파노라마 전경을 기어이 빼내고야 만 거다.
그런데 태산을 이룬 티끌 같은 이들 풍경을 가져다놓은 작가의 ‘변’이 말이다. 이랬다. “도시를 그리는 이유? 선을 많이 그릴 수 있어서다. 뉴욕이나 파리가 많은 건? 선이 많은 도시이기 때문이고.”
결국 작가가 깨달은 건 기법의 차이가 아니라 인식의 차이였던 거다. 다시 말해 노란 게 노랗게 보여야 노랗게 그릴 수 있다는 논리였다. “서양의 선은 경계나 구획을 사용하는 데 쓰인다. 동양의 선은 형체나 기세, 기품을 표현하는 데 쓰이고. 또 같은 선이어도 수많은 표현이 담긴다. 굵고 가는 것에 따라, 천천히 빨리 움직이는 것에 따라.”
그래서 그 선을, 선긋기를 공부해보면 좋겠다 했더란다. 다만 유화란 서양도구를 쓰고 있지만, 철학은 동양미학에 뒀다. 동양화가 핵심으로 두고 있는 ‘기운생동’이다. “나의 호흡을 붓끝에 심어서 화면에 구현하는 게, 부족하지만 세상의 기품을 담아내는 게 나의 길이다 싶었다.”
그렇게 선이 시작이고 결론이 된 화업이 이어졌다. 풍경을 보는 것도 선을 채우기 위해서고, 풍경을 선택하는 것도 선을 얼마나 많이 그릴 수 있을까가 기준이라고 했다. 선을 많이 보여주고 싶으면 지평선을 올리고, 여백을 좀더 주고 싶다 하면 지평선을 내리고. 작가의 선을 향한 집요한 행보는 여느 작가가 색에 목숨을 거는 그 이상처럼 보였다. 그런 작가가 간혹 색을 들이는 건 단지 “리듬을 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보통의 회화가 가지고 있는 관념을 뒤집었다고 할까. 그들의 선은 그저 면과 색을 위한 밑작업에 불과했으니.
작업과정은 어떨까. 우선 사진으로 담아낸다. 세계를 돌아다니며 ‘선 그리기’에 적합한 풍경을 골라 촬영한다. 그러곤 투시법에 따라 라인을 잡고 소실점을 찾는다. “큰 걸 잡아놓고 나면 채울 게 보인다”고 했다. 여기까지가 준비단계인 셈. 이후부턴 본격적인 사투의 시작이다.
일단 붓. ‘세 가닥 세필’의 정체부터 확인했다. 작가가 쓰는 제일 가는 붓은 0.6㎜. 얼핏 작품들이 펜화처럼 보였던 데는 까닭이 있었던 거다. 전시작 기준 20호(72.7×60.6㎝)부터 600호(145.5×480㎝)를 채운 그 위대한 붓질을 구경하지 못한 건 아쉬운 대목이다.
그토록 세세하고 정밀한 작업이지만 작가의 작품은 있는 그대로를 똑같이 옮겨놓는 극사실주의와는 결이 다르다. 작가의 선과 선 사이에는 기교가 아닌 ‘숨’이 들어 있기 때문. 그러니 작가에겐 이 예술이 인간의 한계치를 자주 뛰어넘어야 하는 자신과의 지난한 싸움일 수밖에. “끝까지 가보고 싶다. 작업을 하다가 체력과 정신력이 끝에 왔다 싶을 때 깨뜨리고 넘어서고 싶은 욕망이 있다.” 수행하듯 작업하는 작가는 여럿을 봤지만 ‘철인삼종경기’를 하듯 작업하는 작가는 드물다, 아니 없었다.
한 땀 한 땀 ‘장인’이 이탈리아에 있다고 했나. 한 줄 한 줄 ‘장인’은 여기 대한민국에 있다. 전시는 7월 16일까지.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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