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철의 나락 한 알]예언자, 김종철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공동대표 2021. 6. 28.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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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의 1주기를 앞두고 선생의 <비판적 상상력을 위하여>를 다시 꺼내 보았다. ‘녹색평론 서문집’인 이 책에는 잡지를 발행했던 선생의 마음이 잘 녹아 있었다. 책머리에 선생은 자신의 글을 다시 읽다 받은 충격 두 가지를 언급한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공동대표

첫째, “상식적이고, 현실주의적 생각”으로 일관한 자신의 글을 “이상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으로 여기는 현실에서 받은 충격이다. 병은 뿌리를 뽑으라고 하면서 오늘의 총체적 위기를 산업 문명이라는 근원에서 접근하면 비현실적이라고 무시한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 태도야말로 비현실적이 아닌가. 산업화 이후 불변의 상수로 군림해온 ‘성장’은 기후위기 시대에도 탄소중립의 확고한 동반자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온실가스 배출 없는 성장은 없다’가 진실이니, 기후위기 대응에 성장을 근본 문제로 짚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진실과 상식을 거부하는 시대의 “근원적인 어둠”은 성장 비판을 비현실적이라며 외면한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시대는 오늘도 계속된다.

둘째, ‘녹색평론’ 창간 이후 썼던 자신의 글이 17년이 지난 2008년에도 전혀 낯설어 보이지 않는 데서 오는 충격이다. 현실은 “본질적으로 열악”해졌고 “근대의 어둠”은 더 깊어졌다. 그로부터 13년이 더 지난 오늘, 어둠은 그만큼 더 깊어진 듯하다. 경제 성장이 가져다주었다는 물질의 풍요 속에서 삶은 한층 그악스러워졌다. 노동자가 일하다 죽지 않게 하자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경영 위험 요인이라는 재계의 협박성 호소에 누더기 ‘중대재해처벌법’이 되었다. 지난 4월, 평택항에서 일하다 숨진 이선호씨의 원청업체 안전보건 예산은 지난해 매출액 기준 0.04%,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사항은 197건이다. 돈 앞에 법은 여전히 무용지물이다. 지난 9일, 광주 철거건물 붕괴 참사에서 보듯이 공사 부실과 위법도 여전하다. 비용 절감이 지상 목표인 사업장에서 오늘도 노동자는 죽어가고 정치인은 조문하고 정부는 수사한다. 하루빨리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이전이 어떤 현실이었는지 얼마나 변했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 망각과 무감각의 시대, 어둠만 깊어 간다.

선생의 지극히 ‘현실적’인 경고
이상주의라 여기며 무시한 대가
탐욕의 시대가 끝을 향해간다
그의 ‘비판적 상상력’을 되새겨야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볼 수 있다

세상과 개인의 내면을 짙게 덮은 이 어둠은 어디서 왔을까? 선생은 산업자본주의가 몰고 온 탐욕의 문화가 농사로 일구어온 자족의 문화를 밀어내버린 현실을 애통해했다. 먹을 것을 기르는 농사가 삶의 근본일진대, 산업화로 농촌이 해체되고 농사가 농산업이라는 돈벌이로 전락한 현실에서 삶이 온전할 리 없다. 경제 성장과 함께 내면의 공허와 불안도 늘어났고 그럴수록 성장에 집착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농사는 자연의 이치에 순종하는 겸손을 가르치지만, 자기 증식이 법칙인 자본주의는 오만을 불러온다. 선생은 삶의 근본이 무너지는 현실을 외면하고 풍요만을 좇는 시대의 어둠을 더욱 애통해했다.

구약성경의 대표적인 예언자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멸망을 예고하며 애통해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더욱 애통해했던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비극적 종말의 경고를 동족이 외면하는 어둠의 현실이었다. 유다는 가던 길을 재촉했고, 예레미야의 경고대로 기원전 587년 바빌론 제국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온갖 파국의 징후가 짙어진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현재’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성장과 풍요에 중독된 현실에서 죽음의 싹이 자라는 것을 직시하기란 매우 어렵다.

위기가 코앞에 닥쳐도, 지배 권력은 그 속성상 현재의 지속, 곧 현상 유지를 원한다. 새로운 미래는 기존 질서의 교체와 기득권의 상실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를 ‘영원’으로 절대화하면서 미래의 새로운 전망을 그릴 상상력을 제거한다. 권력에 복무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는 진실을 외면하고 현실을 왜곡한다.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좀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그렇게 우리도 현재에 안주하며 또 다른 세상을 요구할 의지를 잃는다. 변화를 요구하는 희망을 두려워하고 억누른다. 대안을 찾자고 외치는 사람을 외면하고 배척한다. 이런 현실 집착에는 갈 길을 잃은 절망이 숨어 있다. 우리의 무관심과 무감각과 무기력을 먹으며 시대의 어둠은 깊어진다.

문제의 본질과 위기의 근원을 외면하며 현재를 고집하는 한, 결과는 파국뿐이다. 어둠이 억눌러온 현실에 대한 “비판적 상상력”을 회복할 때, 새로운 미래를 볼 수 있다. 그 첫걸음은 죽음을 잉태한 현실을 그대로 보고 애통해하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그랬듯이, 선생은 정직하게 현재의 위기를 애통해했고 비판과 냉소를 감수하며 시대의 어둠을 애통해했던 예언자의 삶을 살았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복음). 김종철 선생님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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