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심리스 착취사회

최민영 경제부장 2021. 6. 28.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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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알게 된 이상 더는 같을 수 없었다. 그날, 스마트폰에서 쿠팡의 애플리케이션(앱)을 삭제했다. 로켓 같은 배송속도의 이면에 냉난방도 되지 않는 숨막히는 물류창고에서 소모용 기계부품처럼 ‘뼈와 살을 갈아’ 상품을 픽업해온 노동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화재로 드러난 흉한 골조처럼 적나라하게 폭로된 이상 이것은 윤리의 문제였다. 쿠팡 측은 과로사가 아니라지만 지난 1년여간 사망한 쿠팡 물류 노동자가 9명이다.

최민영 경제부장

시가총액 100조원으로 올 초 미 뉴욕 증시 상장 신화를 쓴 거대 ‘유니콘 기업’의 이면은 그뿐이 아니었다. 며칠 뒤엔 ‘새우튀김’ 한 조각 때문에 무례한 손님에게 ‘별점 한 개’ 테러를 당한 김밥가게 사장이 쿠팡이츠로부터도 압박을 받다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한 사건이 뒤늦게 알려졌다. 플랫폼 운영기업이 수수료를 내는 자영업자들에 대한 중재는커녕 최소한의 보호장치 없이 책임을 전가해왔던 것이다. 스마트폰 화면 속 결제버튼만 누르면 물건과 음식이 마법처럼 문 앞까지 찾아오는 쾌적한 소비경험은 사람이 사람을 착취해서 가능했던 셈이다. ‘심리스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중요시하는 테크기업이 일궈놓은 매끈한 착취시스템의 공모자로 일조했던 건 아닐까, 화재현장의 연기를 들이마시기라도 한 듯 숨이 막혔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거리 두기에 특화된 소비문화로 부상했지만, ‘아마존’을 모델로 한 거대 온라인 소매유통의 등장은 사실 ‘필수’가 아닌 ‘필요의 발명’에 가깝다. 마트, 백화점, 편의점 등 촘촘한 오프라인 물류가 포화상태인 상황에서 ‘온라인 쇼핑’이라는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것이다. ‘쇼핑’이라는 자본주의 인간의 채집 본능을 ‘당신이 무엇을 필요로 할지’ 빅데이터 기반으로 읽어내고 ‘클릭 한 번’으로 충족시키는 거대 온라인 소매기업은 기존 오프라인 기업들과의 ‘제로섬’ 게임에서 무섭게 몸집을 불려왔다. 지난해 기준 쿠팡 활성고객은 1480만명, 국민 10명 중 3명꼴이다.

이 같은 쿠팡의 성장은 설탕산업의 기시감이 든다. 고칼로리 설탕이 큰 인기를 얻으며 1인당 설탕 평균 소비량은 영국의 경우 1700년 4파운드에서 1850년 36파운드로 9배나 급증했다. 이에 17세기부터 남아메리카를 비롯한 해외 식민지 플랜테이션에서는 사탕수수를 재료로 하는 설탕산업이 성장했다. 주요 노동력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납치돼 이역만리로 끌려간 1000만명의 민간인들이었다. 유럽 소비자들이 커피에 설탕을 타 마시면서 ‘당이 차오르는’ 행복감에 젖을 때 “아메리카는 이 두 작물의 경작지를 대느라고 인구가 줄었으며, 아프리카는 그것들을 재배할 인력을 대느라고 허덕였다”고 18세기 작가 베르나르댕 드생피에르는 적었다.

e커머스 노동자들이 노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채용계약서를 작성하며, 자발적으로 출퇴근한다. 하지만 포장만 ‘선택’일 뿐이다. 중산층을 형성해온 정규직의 괜찮은 일자리가 인류 사상 유례없는 정보통신기술(ICT) 혁명 속에 점점 줄어들면서 노동자들의 선택지 역시 한정되고 있다. 성실한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을 감내하며 일하다 다치거나, 과로사로 내몰린다. 그게 어떻게 온전히 ‘개인’의 탓인가.

또한 ‘한국판 아마존’ 쿠팡의 성장이 어떤 미래를 가져올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아마존은 클라우드 서비스 같은 다른 수익모델을 두고 있다. 하지만 쿠팡의 경우 소매사업 외에는 여타 변변한 수익모델이 없다. 2010년 창업 이후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했는데, 지난해에도 5200억원 적자를 냈고 누적적자는 4조5500억원에 이른다. 낮은 가격, 빠른 배송을 앞세워 출혈 경쟁 중인 쿠팡이 경쟁업체들을 제치고 한국 소매시장을 과점하게 될 경우 결국 소비자에게 비용을 떠넘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최근의 ‘쿠팡 불매·탈퇴운동’은 이처럼 앱버튼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시민들의 경각심이 높아진 현상으로 볼 수 있다. 기업이 흑자 많이 내고, 주가 많이 올리고 배당도 많이 하면 ‘좋은 기업’이던 시대는 저물었다. 환경·사회·지배구조(ESG)를 기업이 핵심 가치에 두느냐가 경쟁력인 시대다. 시민들은 나쁜 기업에 돈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쿠팡 칠곡물류센터에서 고강도로 장시간 심야노동을 하다 과로사한 장덕준씨의 어머니 박미숙씨는 “아들이 쌀과 물을 사서 직접 어깨에 이고 오곤 했다. ‘내가 편하면 누군가는 불편하다. 고통스럽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전한다. 한번쯤 새겨볼 만한 얘기다.

최민영 경제부장 m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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