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반만의 여행, "그래 이런 거 였지"[아침을 열며]

2021. 6. 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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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번잡한 공항을 피하려고 자동차로 이틀 안에 갈 수 있는 곳 중 로키산맥 국립공원을 택했다.

지난 1년 반 동안 집 밖에서 잠을 잔 적도,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도 없고, 소수의 정해진 사람만 만났으니, 사회학자 김홍중의 표현대로 '은둔기계'로 살아온 셈이다.

백신을 맞았어도 이런 여행이 정말 안전할까? 아시아계에 대한 혐오범죄가 빈번하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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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키산맥. ©게티이미지뱅크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번잡한 공항을 피하려고 자동차로 이틀 안에 갈 수 있는 곳 중 로키산맥 국립공원을 택했다. 지난 1년 반 동안 집 밖에서 잠을 잔 적도, 식당에서 밥을 먹은 적도 없고, 소수의 정해진 사람만 만났으니, 사회학자 김홍중의 표현대로 ‘은둔기계'로 살아온 셈이다. 아늑한 은신처를 벗어나 길을 나서자니 마음이 설렜지만 한편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백신을 맞았어도 이런 여행이 정말 안전할까? 아시아계에 대한 혐오범죄가 빈번하다는데. 그 불안감은 가는 길 주유소와 식당에서 더 깊어졌다. 이미 마스크를 쓴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어 마스크를 쓴 우리 가족이 유난스러워 보였다. 중서부 시골 백인들에게 마스크를 쓴 아시아계 가족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며 나도 모르게 마스크 끈을 만지작거렸다.

긴 여정 끝에 목적지에 도착해 호텔에서 체크인하려고 줄을 서 있는데, 내 차례가 왔을 때 두 백인 여성이 불쑥 앞을 가로막고 호텔 직원에게 큰 소리로 불만을 털어 놓는다. 방이 덥고 불편하니 전액 환불을 해 달란다. 어이가 없어 멍하게 서 있는 나에게 사과는커녕 너도 여기 묵지 않는 게 좋을 거라며 청하지 않은 조언을 한다. 이런 무례한 사람들이야 어디든 있을 텐데, 이들이 내가 백인 남자였어도 이처럼 행동했을까 하는 의문이 어쩔 수 없이 든다. 작은 불쾌한 경험이 정체성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것이 이 나라에서 소수인종으로 살아가는 피로감의 일부이다.

그런데 옆 줄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젊은 백인 커플이 자기 차례가 왔을 때 나에게 먼저 체크인하라며 양보한다.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더 오래 기다렸으니 먼저 하라며 물러서지 않는다. 덕분에 체크인을 마친 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방으로 향하는데, 나도 모르게 머리 속에서 무례한 두 여성은 트럼프 지지자로, 친절한 커플은 바이든 지지자로 분류되는 걸 깨닫고 쓴 웃음을 짓는다. 정치적 양극화는 이렇게 일상의 도덕적 질서를 이해하는 나침반이 된다.

다행히 여행길에 만난 이들은 대부분 친절한 커플 같은 사람들이었다. 숙소에서 조직한 등산팀을 인솔해 준 필리핀 이민 2세 레이아는 대학 졸업 후 인생의 다음 단계를 준비하며 등산 가이드를 한다고 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참가자들을 능숙하게 챙기는 이 쾌활한 친구는 좋은 등산로들을 꼼꼼히 가르쳐 주었다. 텍사스에서 온 베티 할머니는 비행기 승무원으로 일하다 은퇴 후 매년 여름 로키에서 자원봉사와 등산을 한단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아내에게 잘하고 있다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다른 등산길에서는 아이오와에서 온 세 여인과 유쾌한 대화를 나누었다. 팬데믹 이후 처음 가족여행을 왔는데, 잠든 남편과 아이들을 숙소에 두고 새벽에 몰래 산행에 나섰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오랜 세월 같이한 그들의 거침없고 편안한 우정이 부러웠다.

소설가 김영하는 낯선 사람들의 환대로 새로운 곳에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하는 게 여행의 이유라고 했다. 오랜만에 떠난 이번 여행길에서 차가운 거절보다 환대의 만남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를 환대해준 이들을 다시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그 짧은 인연은 이미 세상에 대한 내 신뢰의 반경을 넓히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이제 그들의 환대를 내 은둔지를 찾아오는 낯선 손님에게 환대로 갚으면 되는 것이다.

임채윤 미국 위스콘신대학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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