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가 침수 막을 수 없다면 피하라?..기후난민 피난처 제안 '논란'

이정호 기자 2021. 6. 27.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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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구진 "물 위 또는 공중 정착지 만들거나 폭풍 막는 벽 쌓자"
대규모 이주하는 '후퇴' 전략..학계 "탄소 감축 노력 저하 우려"

[경향신문]

해수면 상승에 대응해 건설한 물에 뜬 도시의 상상도. 도시 주변에선 선박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 마이애미대·델라웨어대 연구진 제공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건 망망대해뿐이다. 태평양 같은 넓은 바다여서가 아니라 육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아서다. 온난화로 온 세상이 물에 잠긴 이 행성은 미래 지구다. 초대형 물난리에서 살아남은 소수 인간들은 작은 인공섬을 만들고, 이런 인공섬에 남은 남루한 자원을 차지하려 악당들은 기관총을 쏘아댄다. 원하는 게 생기면 빼앗고, 삶의 제1목표는 생존 자체가 된 지구는 사실상 원시 사회다. 1995년 개봉한 미국 영화 <워터월드> 속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인공섬은 기후변화에 대한 능동적인 대응이 아니라 살아남자니 어쩔 수 없이 만든 마지막 근거지다. 지구가 물에 잠긴 뒤 남은 재료를 긁어모아 만든 것으로 보이는 인공섬은 낡아빠진 고철덩이의 집합체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집에서처럼 쾌적한 삶을 누리는 건 불가능하다.

■ ‘관리된 후퇴’ 계획 제안

그런데 과학계에서 기후변화 대응에 관한 독특한 제안이 나왔다. 이달 말 미국 마이애미대와 델라웨어대 소속 연구자들은 해수면 상승과 같은 기후변화 위협을 피해 사람과 건물을 대대적으로 이동시키는 방안을 고려해야 할 때라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워터월드> 속 인간들처럼 떠밀리듯 생존의 근거지를 짓는 게 아니라 해안가 침수 등에 대비해 질서 있는 대규모 이주 계획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가 불가피한 만큼 인류가 물러설 전략을 짜자는 것인데, 연구진이 제시한 용어는 ‘관리된 후퇴(managed retreat)’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기후변화에 맞서 탄소 배출을 최대한 줄이는 데 집중해 왔다. 전기차와 신재생에너지를 확대하는 게 대표적이다. 일부 과학계에선 이른바 ‘지구공학’도 만지작거리고 있다. 탄소 감축 노력이 미진해 기온 상승을 억누르지 못하면 햇빛을 반사하는 인공물질을 하늘이나 땅에 뿌리는 식으로 열을 식히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 연구진이 제시한 방안은 각도가 다르다. 기후변화에 맞서기보다 현실화된 피해를 인정하고 몸을 피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연구진은 미국 과학매체 사이언스얼럿을 통해 “후퇴라는 개념이 인기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는 모든 선택지를 고려해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2016년 10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시내가 바닷물에 침수됐다. 해수면 상승의 영향으로 폭풍이 없는 맑은 날에도 바닷물이 육지로 밀고 들어오는 현상이 세계 해안가에서 빈번해지고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제공

■ 이주하거나 방어하거나

우선적인 후퇴 방안은 삶의 터전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연구진은 논문에서 “미국에선 주택매입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 30년간 4만5000가구가 홍수 발생이 잦은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며 “하지만 이 정도 수치는 지금도 반복적인 홍수 피해를 입는 가구와 침수 예상 지역에 새로 건설된 가구의 수보다 적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미국에서 잠재적으로 수백만가구가 침수에 위협당하고 있다고 봤다. 기후변화의 힘과 속도에 비한다면 현재 수준의 ‘후퇴’는 새 발의 피이며 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연구진이 제시한 ‘관리된 후퇴’의 개념은 기후변화에 대항하는 방어 행위도 포함한다. 물에 뜨는 부유식 정착지를 짓거나 폭풍을 막을 수 있는 벽을 쌓는 것이다. 도시의 땅 높이를 높여 해수면에서 한참 위로 올라와 있는 공중 정원식 거주공간을 만들 수도 있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 “탄소 감축 노력 훼손 안 돼”

문제는 이런 ‘관리된 후퇴’가 기후변화 대응의 핵심인 탄소 감축에 대한 관심과 노력을 분산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돈과 인력 등을 대대적으로 투입할 경우 탄소 감축에 대한 국가나 기업, 시민의 집중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김백민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교수는 “기후변화에 대응한 ‘관리된 후퇴’라는 개념은 국가별 여건에 따라 시행 여부나 수준이 결정돼야 할 것”이라며 “하지만 최선의 방안은 전 세계 단위에서 탄소 감축을 실천해 ‘관리된 후퇴’를 할 일을 아예 막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자칫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대책의 순서가 오해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기후변화로 인해 해수면 상승뿐만 아니라 대형 산불과 영구동토층 붕괴, 사막화 촉진 같은 문제까지 불거지면서 향후 인류의 대응 방식에 관한 논란의 폭은 더욱 넓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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