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차별은 합리적? '차별금지법'에서 '학력' 빼자는 교육부

이유진 2021. 6. 27.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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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법사위·법무부에 검토서 제출
'학력' 문구에 줄 쳐 사실상 삭제 의견
논란 일자.."해당 조항 재검토"
정의당 장혜영 의원(가운데)이 지난 4월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 계단에서 열린 포괄적 차별금지법 연내 입법 촉구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교육부가 ‘차별금지법’에서 ‘학력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 대상에서 사실상 빼자는 의견을 낸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기관이 ‘학력·학벌주의 관행 철폐’를 국정 과제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의 국정 철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의견을 낸 것이다. 교육부가 부모의 사회경제적 능력에 따른 교육 불평등을 외면하고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는 그릇된 인식을 가진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27일 장혜영 정의당 의원과 교육부의 설명을 종합하면, 교육부는 장 의원이 지난해 6월 대표발의한 ‘차별금지법’에 대한 검토 의견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법무부에 제출하면서 제3조에 명시된 금지대상 차별의 범위에 ‘학력’이 포함된 것을 두고 ‘신중 검토’ 의견을 냈다. ‘차별금지법’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학력, 장애, 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고용, 재화·용역 등의 공급이나 이용, 교육기관의 교육 등에서 이들을 구별하거나 거부하는 등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차별로 규정하고 이를 금지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학력의 범위에는 ‘특정 교육기관의 졸업·이수 여부’, 즉 학벌도 포함된다. 교육부는 ‘신중 검토’ 의견에 그치지 않고 수정안을 제시하며 ‘학력’ 문구에 줄을 쳐 사실상 삭제 의견을 냈다.

교육부가 국회 법사위와 법무부에 제출한 ‘차별금지법’ 검토의견 일부. 장혜영 의원실 제공

교육부가 밝힌 이유는 “학력 차별은 합리적 차별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교육부는 이어 “학력은 성, 장애처럼 선천적으로 결정되는 부분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과 노력에 따라 상당 부분 성취의 정도가 달라진다”며 “과도한 규제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고 검토 사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전경원 경기도 교육정책자문관은 이날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학생의 성적에는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당 부분 개입되어 있어 이것만으로는 개인의 역량을 균등하게 평가하기 어렵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 형성된 공감대인데, 교육 불평등을 해소할 책임이 있는 교육부가 이를 차별의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태”라며 “영재학교 입학생 출신 지역이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 등 사교육 과열지구 10곳에 쏠려있다는 점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학력을 이유로 한 차별’을 차별금지법에서 삭제하자는 교육부의 의견은 ‘학력·학벌주의 철폐’를 국정 과제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 국정 철학과도 모순된 행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에서 ‘학력·출신학교 차별 관행 철폐’를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후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 과제에도 이를 포함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공공기관·지방 공기업에 블라인드 채용을 의무화하고 대입에는 서류평가-면접 등 전 과정에 출신 고등학교 정보 블라인드 평가를 도입했다.

일반 국민들의 정서와도 동떨어져 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지난 1월 발표한 ‘교육여론조사 2020’ 결과를 보면, “현재 한국사회에서 대학 졸업장의 유무에 따른 차별은 어느 정도 존재한다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6.8%가 ‘심각할 정도로 존재한다’고 답했다.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6.5%에 불과했다.

논란이 커지자 교육부는 이날 뒤늦게 “해당 조항에 대해 전반적으로 재검토해 수정 의견을 내겠다”고 밝혔다. 다만 수정안에서 ‘학력’ 문구에 줄을 친 것은 삭제의 의미가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유은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 2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 나와 장 의원의 질의에 “모든 검토 의견을 사전에 보고받거나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해당 법안의 취지에 공감하며 다시 한번 입장을 확인하고 정리하겠다”고 답변한 바 있다.

장 의원은 “이번 논란은 부모의 학력이 자식의 학력을 결정하는 구조가 고착화하는 현실을 교육부가 자각·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며 “교육부 안에서 학력·학벌 차별에 대한 감수성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대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유진 기자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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