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리의 비도 오고 그래서] 수국과 여름 냄새

최우리 2021. 6. 2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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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리의 비도 오고 그래서]

최우리 ㅣ 디지털콘텐츠부 기후변화팀장

올해 봄 변덕스러운 기온과 잦은 비로 이불 빨래할 ‘타이밍’을 놓쳤다. 맑은 날이 이어지는 6월 말이 되어서야 장롱에 숨겨두었던 이불을 꺼냈다. 살림 초보 부부는 ‘이제라도 한 게 어디냐’, ‘역시 스트레스에는 빨래’라며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1년 중 가장 낮의 길이가 긴 절기, 하지 태양빛을 머금고 다시 깨끗해진 이불을 장에 넣으며 지난해 초가을 설치한 제습제도 새것으로 교체했다. 보통 6월 말이면 시작되는 중부 지역의 장마가 평년보다 늦어졌기 때문에 장마가 오기 전에 마땅히 해야 하는 작업을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수국이 필 때 장마가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수국은 활짝 피었지만 장마는 아직이다. 6월께 피기 시작하는 수국은 6월 중순~말께 시작되는 한국 장마 풍경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올해는 빗방울을 머금은 수국보다 초여름 햇살을 받는 수국 모습이 익숙하다. 기상청은 7월 이후 ‘지각 장마’가 시작될 것이라고 최근 예보했는데, 2017년·2014년·1992년에도 7월 초에 장마가 시작된 적이 있기 때문에 이상기후인지는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한자 ‘물’의 뜻을 담은 꽃 수국은 이름대로 물을 매우 많이 필요로 하는 꽃이다. 향기는 나지 않지만 이를 알아채지 못할 만큼 색색의 큰 꽃잎 덕분에 많은 사랑을 받는다. 하얀색·분홍색·하늘색·파란색·보라색 등 수국의 여러 꽃잎은 토양의 pH 정도에 따라 색이 바뀔 수도 있다. 보통 산성일 때 푸른색, 알칼리성일 때 분홍색을 띠기 때문에 학생 시절 과학 시간에 자주 활용했던 ‘리트머스 시험지’와는 반대다. 유튜브를 보면 수많은 원예·식물 박사님들로부터 식초와 베이킹소다를 탄 물에 수국이 심어진 토양을 넣어 중화반응이 나타나는지를 보고 토양의 산성도를 확인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비가 내린 지난 24일 오전 제주시 아라동 남국사를 찾은 한 시민이 산책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마철은 빗소리만 들려 단조로울 것 같지만, 사실 후각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다. 보통 습도가 높으면 공기 순환이 잘되지 않는다. 대기 중에 떠 있는 물 분자에 냄새 분자가 달라붙기 좋은데 향이 날아가지 않고 한곳에 머물게 된다. 향이 널리 퍼지지는 않지만 향을 진하게 오래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숲과 호숫가는 장마철만의 냄새가 있다. 식물의 발아 과정에서 기름이 분출되는데, 이 기름이 돌이나 바위에 고여 있다 비와 만나 비 냄새를 만든다. 과학자들은 이 냄새를 ‘페트리코’라고 부른다. 그리스어로 돌을 의미하는 페트라(petra)와 신들이 흘린 피를 의미하는 이코르(ichor)가 합쳐진 단어다. 흙에서 유기물을 분해하며 사는 박테리아가 비를 맞고 내뿜는 냄새도 있다. ‘지오스민’(geosmin)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후각은 이 냄새를 매우 잘 맡을 수 있다. 식물에 난 털이 비를 맞고 손상되면서 향을 내뿜기도 한다. 비 오는 숲이나 호숫가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향수도 출시돼 있다.

영화 <기생충>에서 참을 수 없는 가난의 상징도 여름 냄새였다. 성능 좋은 방향제는 많이 나왔지만 살냄새까지 덮어버리는 ‘쉰 냄새’는 지울 수 없었다. 봄철 내린 비로 집 베란다 천장에서 물이 샌다는 것을 알았다. 내 나이만큼 오래된 아파트 맨 꼭대기층에 살다 보니 옥상 바닥의 방수 공사를 새로 해야 하는 상황으로 추정된다. 하얀 천장을 어지럽히는 누런 얼룩과 신상 세탁기 위로 떨어지는 페인트 가루는 꽤 신경 쓰이지만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 정도 들었고, 신혼집이기도 하고 해서, 소식 없는 집주인과 실랑이를 하고 싶지는 않다. 일상의 시름을 잊으려 노력하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냥 산다. 흙과 풀에 닿은 빗방울에서 나는 싱그러운 냄새와 물이 샌 집에서 지울 수 없는 꿉꿉함. 수국을 보며 올해 여름 냄새를 미리 상상해본다.

ecowo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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