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서 시작한 삶과 치유의 이야기..연극 '서교동에서 죽다' [리뷰]
[경향신문]
본격적인 공연의 시작에 앞서 무대에 선 배우가 관객들에게 예고한다. 이것은 한 ‘아재’의, 아주 사소하고도 개인적인 이야기라고. 그 말처럼 연극은 한 사람의 오래된 상흔에 대한 사적인 이야기다. 동시에 관객들은 한 개인의 역사 속 “아프고도 그리운 세계”를 따라 한 시절의 막막했던 삶의 풍경들, 그 안의 화해할 수 없었던 기억과 마주하게 된다.
지난 20일 막을 올린 극단 백수광부의 신작 <서교동에서 죽다>는 기억에서 시작한, 삶과 치유에 대한 이야기다. 2016년 <에어콘 없는 방>으로 제6회 벽산희곡상을 수상한 극작가 고영범이 쓰고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역임한 백수광부의 이성열이 연출했다.
관객들에게 이야기의 시작을 알린 사람, 이 작품의 주인공이자 내레이터인 ‘진영’이다. 1962년생,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의 재미 작가 진영은 암투병 중인 누나 병문안을 위해 수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그리고 작가를 꿈꾸며 편의점에서 일하는 이십대 조카 도연과의 대화를 통해 차츰 마음 한 켠에 묻어뒀던 어린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연극은 진영과 가족들이 재회한 현재 시점에서 출발해 그가 유년 시절을 보낸 옛 서울 서교동과 화곡동을 오가며 전개된다. 그 시절 진영의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부촌이던 서교동에서 화곡동의 시장통으로 이사하고, 어머니는 간경화로 몸져 누운 아버지를 간병하며 시장에 구멍가게를 열어 생계를 이어간다. 건강을 포기하고 술만 마시는 아버지, 그런 남편과 자식 넷을 건사하기 위해 분투하던 어머니, 어머니의 요구로 남자 형제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던 누나 등 진영에게 가족은 원망과 피해의식, 죄책감이 중첩된 대상이다. 그리고 죄의식의 중심에는 자신이 돌봐야 했던 막내 동생, 진수가 있다. 이제 치매에 걸린 노년의 어머니를 통해서나 가끔 불리는 이름, ‘진수 삼촌’에 대해 묻는 조카 도연에 의해 진영은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 보기 시작한다. 그해, 두 명이 죽었다. 한 명은 화곡동에서, 또 한 명은 서교동에서.
기억과 상처에 대한 연극이지만 세대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소탈하면서도 시니컬한 진영은 소위 ‘86세대의 전형’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기 자신을 반성적으로 들여다보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진영을 통해 한 세대의 내면과 현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영과 대비되는 90년대생 조카 도연은 진영의 이야기의 직접적인 청자이자 스스로를 마주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고 글을 쓰는 인물이다. 동시에 단순 청자를 넘어 새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갈, 극의 마침표를 찍는 인물이기도 하다. 자신의 글을 쓰는 젊은이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진영의 말처럼, 작가는 “도연을 통해서야 전 시대를 들여다보는 일은 가능해지고 이게 이 이야기의 희망이라면 희망”(‘작가 의도’)이라고 밝힌다.
선뜻 꺼내기 어려웠던 한 개인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지만 연극은 인물이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이를 마주하고 치유해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최근 <파우스트 엔딩>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인 배우 박완규가 진영을 연기한다. 수십년의 세월을 오가며 때로 능청스럽게, 또 담담하게 내면의 원망과 죄의식, 아픔과 상처를 전달하는 열연이 관객 마음을 울린다. 공연은 서울 대학로 씨어터 쿰에서 7월4일까지.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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