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나의 궁전으로

한겨레 2021. 6. 2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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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지호의 절친이자 어머니인 오하라는 가수원동 댁에서 옆 동네 영마트에 이르기까지의 지름길을 안다.

"바깥으로 나와 돌도 밟고 시영 자전거도 타고 바람도 맞고 길가에도 막 앉으니 겪고 있는 그만큼이 다 나의 것 같다." 내게도 가게 앞에 다리 뻗고 앉아 내 몸이 길가의 무엇인 것마냥 있던 시간이 생생하다.

"내 얘기도 나와?" 나오지만 읽지 말아 달라는 말에 그는, "알았어, 숫제 안 볼게" 답했다.

지호와 한나처럼 오하라와 김남순이 글을 쓰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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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서한나 ㅣ 페미니스트문화기획자그룹 보슈(BOSHU) 공동대표

내 친구 지호의 절친이자 어머니인 오하라는 가수원동 댁에서 옆 동네 영마트에 이르기까지의 지름길을 안다. 가수원 근린공원의 개구멍을 통하면 영마트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고 했다. 나의 어머니인 김남순 또한 같은 길로 가는 법 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다닌다. 그런 당신을 가리켜 “엄만 참 매구 같지?” 한다. 오하라의 고향은 공주, 김남순의 고향은 안성. 가수원동에서 딸들을 길러 먹이느라 시장을 오가며 떡이며 기름을 사다 날랐대도 서로 마주친 기억 없이 바빴다.

지호 식으로 표현하자면, “만 걸음을 걸어 만개의 이름을 익힌 오하라는 호기심 많고 기억력이 좋다”. 한편 김남순은 토마토에 간이 드는 시기를 혀로 알아낸다. 먹을 게 변변찮던 시절 농익을 대로 농익은 토마토를 밭에서 따먹던 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김남순의 능통함은 촌철살인의 한마디에서 빛난다. 용돈을 주고 생색을 내면 “코끼리한테 비스킷 준다”며 웃고, “잇새에도 안 낄 돈”이라며 상황을 정리한다. 나는 김남순의 구수하고 호쾌한 표현에 배 잡고 웃기에서 멈추지 않고, 같은 곳을 자극해줄 언어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호기심 많고 기억력 좋은 오하라를 빼다 박은 지호의 글을 좋아한다. 이 말맛은 서점 에세이 코너에서 찾기 어려워, 그의 블로그에 새 일기가 올라오면 돈을 주운 것처럼 반갑다.

구수함에 대한 갈증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을 안기고 싶은데, 내가 후리지아(프리지어)밖에 몰라 지겨울 때 강해진다. 백날 비슷한 꽃을 고르고 겨우 크라프트 포장지에 싸달라고 하는 것으로 개입해본대도 나는 값 치르고 나오면 그만인 소비자다. 현대의 운치가 그리울 때는 지호의 일기를 읽는다. “바깥으로 나와 돌도 밟고 시영 자전거도 타고 바람도 맞고 길가에도 막 앉으니 겪고 있는 그만큼이 다 나의 것 같다.” 내게도 가게 앞에 다리 뻗고 앉아 내 몸이 길가의 무엇인 것마냥 있던 시간이 생생하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집에 화분이라도 있으면 다를까 싶어 좌판의 화분들을 전보다 유심히 본다. 물은 어떻게 주면 돼요? 이건 키우기 쉬워요? 주인이 한가로운 틈을 엿봐 치고 빠지듯 묻는, 식물 무식자는 노력할 뿐, 베란다의 알로카시아가 싹을 틔우면 분양해서 너 하나 주겠다 기약하는 김남순의 지혜에 가닿지 못한다. 지호는 오하라의 살림에서 흡수한 것을 바탕으로 손을 움직여 식탁을 꾸미고 속을 달랜다. 그리고 블로그에 쓴다. “원하는 키의 시금치는 다듬을 때도 조리할 때도 먹을 때도 언제나 만족스럽다.”

나는 충청도 앉은굿이나 전라북도 연해 지역의 간척 이야기만큼이나 지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구성진 말맛과 몸의 리듬 역시 지역의 자원으로 여긴다. ‘지역 소멸’을 이런 식으로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구수함을 높이 평가하며 그것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세상. 오후 나절 한갓지게 막걸리로 낮술하고 블로그에 안주로 나온 두릅이랑 두부김치가 맛있었네 맛없었네 하는 말을 자주 보고 싶다. 동네마다 냄새도 소리도 다르니, 이곳에 왔구나, 느끼게 하는 특유의 공기를 그들의 말로 낱낱이 남겨주길, “약수터 돌자” 하면 되묻지 않고 차라리 웃어주길 기다린다.

산문집 막바지 작업 중에 김남순이 물어왔다. “내 얘기도 나와?” 나오지만 읽지 말아 달라는 말에 그는, “알았어, 숫제 안 볼게” 답했다. 지호와 한나처럼 오하라와 김남순이 글을 쓰면 좋겠다. 그건 순전히 나 좋으려고. 마음 놓고 구수해지고 싶어서. 잠 안 오는 밤, 불 꺼진 방에서 귀 파주는 상황극을 유튜브로 찾아 들으며 요람의 포근함을 애써 불러오려는 것은 마음을 놓기 위함이다. 식물이 죽고 소리도 없는 방에서 나는 마음을 놓고 싶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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