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은의 야구민국] 최익성 "스포테인먼트계의 SM이 목표"

2021. 6. 2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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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선수 출신 사업가 최익성
6번 이적 등으로 야구계 대표적 저니맨으로 
은퇴 후 다큐멘터리 제작 등 사업가로 변신 
"스포츠 콘텐츠는 스포츠맨이 제일 잘 안다"
'저니맨' 최익성. 야구계를 은퇴한 후 사업가로 변신했다. 박상은 기자

"다큐멘터리 감독 최익성입니다."

최익성? 야구팬이라면 독특한 타법으로 이단아로 불렸던 야구 선수 한명을 떠올릴 것이다. 맞다. 당신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최익성이다. 올해 출판사를 차려 자서전을 찍어내더니 지금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변화의 폭이 너무 커 어리둥절해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에겐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저니맨(Journey man). 최익성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저니맨은 스포츠 용어로 해마다 혹은 여행을 다니듯 팀을 옮기는 선수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이 용어보다 그를 더 정확하게 설명할 단어도 없다. 1997년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한화, LG, 해태, 기아, 현대, 삼성, SK를 거쳤다. 짧으면 1년, 길면 2년 간격으로 팀을 옮겼다. 6번의 이적과 친정팀 복귀, 구단해체와 신생팀에서의 선수생활을 두루 경험했다. 심지어 미국과 멕시코로 날아간 적도 있었다. 그 사이 풍운아, 이단아, 시대를 앞서간 사나이 등 그를 수식하는 별칭들이 훈장처럼 주렁주렁 달렸다.

지금은 이단을 넘어 삼단으로 치닫고 있다. 외모부터 달라졌다. 연예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세련된 입성에, 황금빛으로 물들인 머리카락이 이목을 끈다. "사업가라고 불러달라"면서 내민 명함에는 스포엔터테인먼트회사 대표라는 직함이 박혀 있다. 스포엔터테인먼트는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를 합친 단어다. '사업가' 최익성의 다큐멘터리는 그의 야구 인생을 담고 있다. 말 그대로 스포츠와 엔터네인먼트를 합한 영상이다.


"야구가 아닌 다른 걸 시켜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 야구인생은 그날 밤에 시작되었습니다."

최익성은 중학교에 들어와서야 야구에 입문했다. 야구광이었던 아버지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넌지시 "야구 해보지 않을래?" 하면서 야구를 권했지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다소 늦은 나이에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러나 진짜 시작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말에 야구부 감독이 아버지를 찾아와 어렵게 말을 끄집어냈다.

"익성이한테 야구가 아닌 다른 걸 시켜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얼마 후 술을 마시고 들어온 아버지가 익성을 불렀다.

"익성아, 힘들지? 너무 힘들면 야구 안 해도 된다."

익성은 아버지에게서 그렇게 힘이 빠진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아버지에게 야구는 마음의 고향 같은 것이었고, 야구 이야기를 할 때마다 늘 소년처럼 설레는 음성이었다. 어린 익성은 앉은 자리가 땅 밑으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2년만 시간을 주세요. 후회 없이 해보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깨끗하게 접겠습니다."

아버지가 떨구었던 고개를 버쩍 들었다. 그리고 한없이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고맙다!"

2년 동안 야구만 생각했다. 잠자는 시간까지 아꼈고, 주말도 평일과 다름없이 훈련했다. 야구부 친구들이 가끔 같이 놀러 가자고 유혹했지만 거절했다. 그 바람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목표는 ‘완전 연소’였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야구에 쏟아부었다.

연습생 신분으로 프로에 입단했다. 3년 만에 기회가 찾아왔다. 1996년, 1군 등록 후 대타 대수비 요원으로 출전했다. 이를 악물었다. 1년 만에 전성기가 찾아왔다. 이듬해 붙박이 1번 타자에 22홈런, 33도루, 타율 0.296이라는 엄청난 성적을 냈다. 야구계에서도 드디어 최익성이란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긴 기다림 끝에 탄탄대로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꽃피는 시절은 길지 않았다. 이듬해 서정환 감독이 부임하면서 스텝이 꼬이기 시작했다. 코치진에서 타격폼을 지적했다. 고분하게 말을 들을 최익성이 아니었다. 코치진과의 불화는 점점 격화됐다. 일각에서는 대구 일부 고교팀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코칭스태프가 타학교 출신인 최익성을 홀대한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어찌 되었든 코치진은 타격폼만 고치면 성적이 더 올라올 텐데 고집만 피운다고 판단하고 그를 언저리로 밀어냈다. 타자의 개성과 타격폼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지금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운도 없었다. 그해 마침 거물 신인 강동우가 입단했다. 결국 1번 타자 자리를 내주었다. 그렇게 그의 저니맨 인생이 시작됐다. 그 지역의 지리를 익힐 만하면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됐다. 몰입도가 깨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뜨내기처럼 살다 보니 진득하게 연애할 시간도 없었다. 그는 아직 솔로다.

최익성이 2021년 현재 신인으로 데뷔했다면? 팀에서 개성 만점 스타로 자리 잡지 않았을까. 지금은 그가 활약했던 시절과 다르게 선수의 개성을 존중하는 분위기다. '티라노 타법'(박병호), '블루투스 타법'(정훈) 등 별칭까지 붙여주면서 즐길 정도다. 그런 면에서 그를 그저 저니맨, 이단아로만 칭하긴 아깝다. 편견과 싸우면서 개성 만점 후배들을 위해 길을 닦아놓은 선구자로 평가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스포츠 콘텐츠는 스포츠를 해본 사람이 제일 잘 안다"

야구계를 떠나 전혀 뜻밖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그에게 도전은 여전히 유효한 삶의 화두다. 오히려 더 큰 의미가 부여된 키워드다.

"야구계가 좁다고 느꼈습니다. 더 큰 세계에서 좀 더 크게 승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야구인이 야구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성공하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운동 선수가 무슨 책에 콘텐츠 개발이냐"는 비아냥이 늘 따라붙었다. 자서전 '아무도 궁금하지 않은 나만의 이야기'를 펴낼 때도 그랬다. 계약을 하겠다는 출판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아예 출판사를 차렸다. 최익성의 도전법이다. 논란의 타격폼처럼, 그만의 개성으로 승부를 걸었다. 전례가 없으면 전례를 만들어버리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왔다. 야구장 안팎에서 한결같은 모습을 지켰다.

스포테인먼트 개척자로서 할 말이 많아 보였다. 그는 "엔터테인먼트 사업 부분은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스포테인먼트 부분은 아직 갈 길이 멀다"면서 "스포테인먼트를 바탕으로 이 안에서 책도 발간할 수 있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수 있고, 영화도 만들 수 있고 웹툰을 만들 수도 있고, 선수를 육성 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스포츠 콘텐츠는 스포츠를 해본 사람이 제일 잘 압니다. 운동선수 출신들이 이 분야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운동선수만큼 이 부분에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포츠인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면 다양한 콘텐츠 생산이 가능합니다."

그는 야구인 최익성에서 그치지 않고 세상에서도 개성 만점 최익성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선수들이 은퇴 후 코치, 감독에만 뛰어들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진출해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사업가 최익성'의 목표다. 그는 "스포테인먼트계의 SM으로 우뚝 서겠다"고 호언했다. 그의 자신감의 배경은 야구다.

"야구에서 배우는 스포츠맨십과 협동심, 희생 같은 정신은 야구 바깥의 삶에 있어서도 가장 훌륭한 지식이자 지혜이고, 한 인간으로서의 자산입니다. 어느 분야로 가든 야구 정신만 제대로 박혀 있으면 반드시 성공합니다. 제가 그걸 제일 먼저 보여드리겠습니다."

박상은 기자 subutai117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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