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은의 야구민국] 경주고 "열정 하나는 전국 최강!"

2021. 6. 26.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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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고 야구부 탐방 
2008년 해체, 2013년 재창단으로 새출발 
새벽 한 시까지 자율 훈련으로 구슬땀 
학교장 "학교 넘어 지역민의 자부심 되고파"
경주고 야구부. 최근 달라진 팀 분위기로 희망찬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박상은 기자

경주고 야구장에는 자정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다. 나직하고 묵직한 소란에 어둠이 자정이 넘도록 운동장 밖을 서성일 때도 있다. 야구부 학생들 때문이다. 고3 학생들을 중심으로 10시 점호 후에 운동장으로 나와 연습한다. 늦도록 불이 켜진 야구장의 풍경은 경주고의 현재를 상징하는 가장 강렬한 이미지다.

훈련하는 모습이나 열정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강팀이지만 경주고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먼 팀이다. 심지어 팀 해체의 파고를 넘어 겨우 살아남았다. 2008년 학교 사정으로 야구부가 폐단을 수순을 밟았다. 소식을 접한 동문들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이듬해부터 재창단을 추진해 2013년에 기어이 다시 야구부원을 모집했다. 이태일, 정경훈, 김민호, 권희동, 전준우, 최익성 등 다수의 프로스타를 배출한 이력이 무색하지 않게 동문의 열정으로 야구팀이 다시 부활한 것이었다.

그러나 감동 스토리는 딱 거기까지. 현실은 너무도 팍팍하다. 눈에 번쩍 뜨일 성적을 낸 적도 별로 없다. 가장 속 쓰린 부분은 인근 포철고등학교와 경쟁에서 밀린다는 점이다. 두 학교는 오랫동안 경북의 왕좌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해왔다. 그러나 최근 10여년 동안 줄곧 포철고에 밀리고 있다. 무엇보다 선수 수급이 문제다. 학생들이 대도시로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면서 소위 대도시 명문고와 비교해 선수층이 엷다. 현재 야구부원은 27명으로 미니팀이다. 동창회의 관심과 후원이 있기는 하지만 ‘야구광’ 동문들이 수두룩한 몇몇 고교와 비교할 때 아쉬운 수준이다.


'신라의 달밤'을 뜨겁게 달구는 땀과 열정

이런저런 사정을 아는 사람들에게 야간 훈련은 말 그대로 감동 그 자체다. 누에고치처럼 꼼틀거리면서 조금씩 조금씩 희망의 실마리를 만들어내는 고된 작업임을 아는 까닭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밤이 아름답다는 것. 말 그대로 ‘신라의 달밤’이다. 도심이 높은 건물이 없어서 해가 지면 하늘이 우주까지 열린다. 첨성대와 안압지까지 차를 타고 3분이면 닿고, 오릉과 선덕여왕릉, 황룡사터, 김유신 장군묘까지는 7분 거리다. 천년고도는 그렇게 방망이가 공과 부딪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타격음을 들으며 잠이 든다. 경주의 야구사랑을 키워나가는 기분 좋은 자장가다. 지역의 야구부는 동문을 비롯해 지역민을 하나로 묶는 매개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밤늦도록 환하게 불이 켜진 야구장의 풍경은 말 그대로 천년고도의 지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포집기인 셈이다.

강제는 전혀 없다. 말 그대로 자율이다. 김상엽 감독의 독특한 독려법이 크게 작용했다. 학교 관계자의 말마따나 강압적으로 새벽 1시까지 훈련을 시킬 수는 없다. 그는 실력을 떠나 열심히 하는 선수가 더 신나게 운동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주말리그 등에서 경기를 하면 평소에 구슬땀을 흘린 선수를 봐두었다가 한 타석이라도 더 뛰게 해준다.“너 어제 배팅 연습 몇 개나 했어?”하는 질문을 던진 후 “감각이 살아있겠네. 한번 나가봐”하면서 기회를 준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말쯤으로 생각하던 선수들이었지만, 어느 순간 훈련에 임하는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선수들이 밤을 뜨겁게 달구면서 관계자들도 바빠졌다. 박평규 야구부장은 그저 선수들의 모습이 대견해서 야구장으로 내려온다. 혹시 모를 사고를 걱정하는 마음도 반이다. 차민규 코치는 “아이들 때문에 잠을 못 진다”면서도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김상엽 감독이 불러온 희망의 변화

경주고에 불어온 희망어린 변화는 지난해에 감행한 대대적인 코칭 스태프 개편에 힘입은 바가 크다. 무엇보다 김상엽 감독의 프로필이 눈에 띈다. 김 감독은 대구고를 졸업 후 1989년부터 삼성에서 프로 생활을 했다. 1군 통산 258경기 등판 78승 56패 49세이브를 기록했다. 한 마디로 선수 시설 삼성라이온즈의 에이스였다. 김 감독이 선수 시절 구사했던 파워커브는 지금도 야구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구종이다. 대한민국에서 김 감독만큼 강렬한 파워커브를 구사했던 투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불같은 강속구와 고속에서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그의 파워 커브는 한 마디로 압권이었다. 그는 1995년 17승을 거두며 자신의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을 세웠고, 1993년 170탈삼진을 기록해 이 부문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를테면, 삼성라이온즈 투수층이 얇았던 80, 90년대 김시진 김상엽 박충식 몇 안 되는 전국구 에이스 중의 한 명이었다.

김상엽 경주고 야구부 감독. 1989년에 프로에 입문, 선수 시설 삼성라이온즈의 에이스로 통했다. 김 감독이 선수 시절 구사했던 파워커브는 지금도 야구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구종이다. 박상은 기자

김 김독의 교육 철학은 스스로 하고 싶어 하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훈련하는 모습이 변하면 자연스럽게 성적이 나오기 마련이라는 생각이다. 감독의 이런 마인드에 선수들은 야간 훈련과 활기찬 분위기로 호응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즐기면서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앞장서서 ‘나를 따르라’하는 것보다는 옆에서 보좌하고 이끌어 주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주고의 분위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선수가 있다. 야구팀을 넘어 경주고 ‘명물’로 통하는 권태욱 선수다. 중견수와 2번 타자로 뛰고 있다. 거침없는 플레이와 도전정신으로 무장한 친구지만, 권 선수를 부각시킨 것은 ‘목청’이다. 공격시에는 벤치에서 파이팅을 불어넣고, 수비 때는 투수의 공 하나하나에 악을 쓰면서 용기를 불어 넣어준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야구장이 쩌렁쩌렁 울린다. 1회부터 9회까지 조용할 틈이 없다. 코치들은 그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면 싱긋이 웃는다. 그의 넘치는 열정이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어느 야구 관계자의 말마따나 인지도만 따지면 주말리그의 진정한 승자다. 상대팀 선수든 코치진이든, 관중이든 경주고 경기를 한번이라도 본 이라면 권 선수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권 선수가 그라운드에 나타나지 않으면 상대팀 코치, 관객 할 것 없이 “그 선수 어디 갔습니까? 아파서 못 나오는 건가요?”하고 물어올 지경이다.

여기에 승부욕은 메이저리그급이다. 경기에서 패하면 닭똥 같은 눈물을 쏟아내기 일쑤다. 특히 아깝게 패하면 동료 선수의 말마따나 “나라를 잃은 듯” 서럽게 운다. 경주고 야구부의 열정을 지키는 ‘야구 수호신’이다.

야간 훈련 중인 권태욱 선수. 권 선수의 열정과 ‘목청’은 경주고의 트레이드 마크다. 박상은 기자
야간 훈련 중인 최희승 선수. 밤을 잊고 흘린 땀방울이 거대한 결실로 맺히길 기대해본다. 박상은 기자

코칭 스태프 교체와 열정적인 선수의 등장 같은 긍정적인 요소들 덕분에 분위기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올해 들어 경기를 거듭할수록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주말리그 관계자의 전언이다. 6월 말 현재 전후반기 주말리그에서 통산 4승7패를 기록했다. 4승이나 올렸단 점에 방점을 찍는 이들이 많다. 7번 지기는 했지만 후반기 들어서서 쉽게 물러나는 경기가 없다. 전반기 경상A권역 전승으로 우승을 차지한 마산 용산고등학교와의 대결에서도 8회까지 동점으로 선전을 했다. 9회에 대량 점수를 내주면서 무너졌지만, 예전의 경주고라면 상상도 못했을 근성과 실력을 보여주었다.

김 감독은 “현 경주고 야구부원은 중학교 때부터 야구에 도가 트인 S급 선수로 구성된 팀은 결코 아니지만, 야구에 대한 마인드, 열정, 야구를 대하는 태도 등은 서울이나 대구에 있는 강팀 소속 선수들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동문의 유별난 야구 사랑... 학교와 동문 지원 아끼지 않을 것"

최근 경주고에 합류한 차민규 코치. ‘펑고의 달인’으로 통한다. 박상은 기자

얼마 전 앞으로의 성적에 대한 기대치를 한층 높이는 변화가 또 있었다. 대구고에서 전국 3관왕을 함께한 차민규 코치가 최근 경주고 야구부에 합류했다. 차 코치의 열정과 펑고 기술은 아마 야구계에서 정평이 나있다. 특히 ‘펑고(야수가 수비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배트로 쳐주는 타구)의 달인’으로 통한다. 차 코치의 펑고를 받아본 선수는 하나 같이 “펑고로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저것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달려가지만 막상 글러브를 내밀면 얼토당토않게 새버리기 일쑤고, 때론 도저히 안 될 것 같은데 글러브로 쏙 들어오기도 한다. 선수들의 말을 빌자면 “차민규표 잡을동 말동 펑고”다. 이와 관련해 특허 출원을 요청해놓고 있다.

박평규 야구부장도 경주고가 보유한 또 하나의 ‘열정’이다. 훈련은 물론이고, 연습경기, 친선전, 주말리그까지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런 열정 덕분에 감독 이상으로 아이들의 현재 상태 및 기량을 잘 알고 있다. 감독이 스카웃 정보 수집으로 자리를 비울 때면 감독의 빈자리까지 메워준다. 아이들에게는 ‘두 번째 감독’이나 다름없다. 경기에서 질 때면 누구보다 속상해 하고, 이기면 아이처럼 좋아한다. 선수들이 다치거나 데드볼이 발생하면 놀라는 소리가 기자석까지 들릴 정도이다. 박 부장은 “아이들이 승패를 떠나서 부상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겼을 때 패한 팀을 배려하고 패했을 때 의기소침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 그것이 제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백상길 경주고 교장. 백 교장은 "경주고 동문의 야구 사랑은 유별나다. 야구부를 매개로 학교와 동문, 지역이 하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면서 "경주고 야구부가 학교와 동문을 넘어 지역의 자부심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박상은 기자
경주고 마크. 경주고 야구부는 2008년 해체됐다가 2013년 재창단했다. 박상은 기자

교장 선생님의 관심도 야구부를 지탱하는 거대한 에너지다. 백상길 경주고 교장은“야구부가 있어 공부만 하는 학교라는 이미지에 활기까지 더해지고 있어 무척 고무적이다”면서 “야구 부원 이전에 경고인으로써 인성과 품위를 겸비한 인격체로 육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동문과 함께 야구팀 발전을 위해 더욱 힘쓰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동문들이 야구에 관심이 많습니다. 현재 야구부가 처한 상황이 녹록지는 않지만, 학교와 동문에서 최대한 지원해서 경고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겠습니다. 야구부가 지역민과 동문을 하나도 만드는 매개체가 될 수 있도록, 경주고를 넘어 지역의 자부심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경주고는 7월6일(화) 청룡기 전국고교 야구대회 1회전에서 서울 동산고교을 치른다. 2003년 대통령배 전국 고교 야구대회 결승 진출 이후 또 한번의 기적을 벼르고 있다. 경주고의 야구 르네상스가 재현될 수 있을지 동문과 지역민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열정남 권태욱. 1회부터 9회까지 쉴 새 없이 파이팅을 불어넣는다. 경상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박상은 기자
3학년 유호성 선수. 공수주(공격 수비 주루)에서 빠지는 부분이 없는 만능이다. 현재 4할 타율 기록 중이다. 박상은 기자
3학년 최희승 선수. ‘경주고의 김지찬’으로 통한다. 센스 만점의 내야수다. 박상은 기자
2학년 안준현 선수. 경주고의 안방마님(포수)이다. 박상은 기자
1학년 이서현 선수. 경주고 핵 잠수함. 언더핸드 투수다. 박상은 기자

박상은 기자 subutai117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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