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계 로힝야족이 미얀마서 박해받는 까닭은

한겨레 2021. 6. 26.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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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랜선 동남아][토요판] 랜선 동남아
(17) 동남아시아의 인도인
영국의 식민지 정책 따라
인도인들 동남아 대거 이주
민족별 직업 등 영국이 정해
시크교도는 경찰·용병으로
체티아르 상인은 대부업 종사
타밀족은 고무 노동자 생활
인도 출신 무슬림 로힝야족은
영국의 버마족 지배에 동원돼
영국 떠난 뒤엔 탄압 대상 돼
미얀마 라카인주에 살던 로힝야족 70여만명은 2017년 8월 미얀마군에 쫓겨 방글라데시로 탈출했다. 이듬해 6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 있는 한 난민촌에서 로힝야족들이 여성용 구호물품을 받고 있는 모습. 인도계인 로힝야족은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미얀마에 대거 이주해 살다가 미얀마의 독립 이후 버마족들로부터 박해를 받아왔다. 콕스바자르/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영화 <비치>의 배경이 된 피피섬으로 유명한 태국(타이)의 끄라비는 코로나가 퍼지기 전까지 떠오르던 신혼여행지이자 가족여행지였다. 끄라비는 또, 동남아시아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는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고대 인도-동남아시아 관계를 기원후 3~4세기까지 끌어올려줄 유물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인도-그리스 복합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화가 유명하고, 무엇보다 인도 고대 문자의 하나인 브라흐미(Brahmi)로 쓰인 석제 초석이 발견되었다. ‘페룸 파탄’(Perum Patan)이라 적힌 문자의 의미는 ‘위대한 금세공업자’로, 사금이 많이 채굴되던 이 지역에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 북부 지역에 걸쳐 살던 타밀인 금세공업자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았음을 보여준다.

인도와 동남아시아는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일찍부터 상업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까닭에 문화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남아시아인들을 통해 힌두교와 불교가 동남아시아에 들어오기도 했으며, 이후 이슬람교가 진출했을 때는 이슬람화한 인도인들이 해양부 동남아시아 이슬람화의 중요한 매개가 되기도 했다. 즉, 동남아시아인들에게 인도와 상업적 관계를 맺거나 인도인들로부터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18세기 정도까지 두 지역의 관계는 갈등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나름 평화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동남아시아인과 인도인의 관계는 피지배와 지배로 급변하는데 그 원인은 바로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 있었다.

미얀마의 젖줄인 에야와디강. 에야와디강의 하류 삼각주 지역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쌀이 생산되는 지역 가운데 하나다. 위키피디아

시크교도는 홍콩 등에서 경찰 담당

16~17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의 동방항로 진출로 유럽인들을 맞이하게 된 동남아시아가 본격적으로 식민화한 것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부터였다.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게 된 유럽은 대량의 천연자원이 필요했고, 다양한 자원과 자연환경을 보유하고 있던 동남아시아가 그 주요 타깃이었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섬이 많은 해양부 동남아시아의 경우 식민지가 된 이후 주석과 같은 광물자원이나 상품작물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수출되고 있었다. 반면, 버마(현 미얀마)의 에야와디강, 시암(현 태국)의 짜오프라야강, 베트남 남부의 메콩강 유역을 중심으로 대량의 벼농사가 진행되고 있던 대륙부 동남아시아 지역들의 경우 서구 제국의 통제 아래 쌀과 같은 식량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인구가 많은 주변의 인도, 중국 등 역외로 수출되거나, 상품작물을 생산하느라 식량자원이 부족해진 역내의 해양부 동남아시아로 수출되었다. 1869년 개통한 수에즈 운하 덕분에 매우 가까워진 유럽 역시도 주요 수출시장이었다.

문제는 피식민지로서 동남아시아는 땅이 넓고 식생도 다양한 반면,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이다. 식민지 이전 동남아시아는 자급자족하거나 역내에서 유통될 수 있을 정도, 혹은 더 남는다면 가까운 중국이나 인도로 수출할 수 있을 정도, 혹은 장기 운반이 가능한 일부 품목의 경우 무슬림 상인들에게 팔 수 있을 정도의 농업, 광업, 어업, 임업 상품만을 생산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생각하던 식민지 경제는 그 수출 대상이 세계시장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넓은 경작지를 조성한 뒤 최대한 많은 인구를 투입하여 최대한 많은 생산물을 생산해내는 방식이었다. 여기서 관건은 노동력 확보였다. 19~20세기에 중국계, 인도계 노동자들이 동남아시아로 대거 유입된 이유가 이것이었다.

중국계 이주민들이 동남아시아 전역에 퍼졌던 것과는 달리, 인도인들의 이민은 대부분 영국 식민지 내에서의 이동이었다. 그런 이유로 18세기 후반에 인도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한 영국이 19세기 바다를 통해서는 싱가포르섬과 술탄들이 다스리던 말레이반도로, 육로로는 콘바웅 왕조가 다스리던 미얀마로 이동했을 때, 인도인들 역시 군인, 상인, 노동자, 관료 등의 다양한 얼굴을 하고 진출했다. 흥미로운 점은 영국인들이 인도인들의 이주를 계획 및 장려하면서 그 직업을 식민지배자의 눈으로 본 인도 각 지역의 특징과 습성을 토대로 분산 배치하였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 등으로 나뉜 이 남아시아 지역이 워낙 땅이 넓고 지역 간에 이질성이 강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선입견 탓이기도 했다.

1900년께 라이플을 들고 있는 싱가포르의 시크교도 군인. 영국령 식민지에서 높이 솟은 터번을 쓴 시크교도는 치안 유지에 주로 동원되었고, 피식민인들에게는 식민과 통제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대표적인 예가 주로 경찰이나 용병, 군인으로 진출한 시크교도들이다. 머리보다 큰 터번을 쓰는 교도들로 유명한 시크교는 영국 점령 이전에 인도 서북부 지역,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인 펀자브 지역에서 발생한 종교로, 그 탄생부터 무굴제국과의 투쟁으로 시작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 이유로 영국은 무굴제국을 점령하고 난 뒤 펀자브 지역의 시크교도들을 경찰력이나 군인으로 많이 활용하였고, 이후 싱가포르, 말레이반도, 미얀마의 양곤, 더 나아가 홍콩이나 상하이의 조계지에서도 이들에게 경찰이나 군인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1873년 말레이반도 페락주의 주석광산에서 암약하던 중국계 비밀결사 조직들을 진압하기 위해 불러들인 이들 역시 무장한 시크교도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몇몇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 시크교도들이 식민지배자의 ‘충견’으로 여겨져 배척의 이미지로 남아 있기도 하고, 혹은 도시의 치안을 담당해왔다는 이유로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이 경비 관련 업무를 담당하기도 한다. 심지어 말레이시아 페낭의 중국계 씨족협회 건물에는 그 정문에 시크교도의 석상이 서 있기도 하고, 영국의 식민지배가 끝난 이후에도 시크교도의 후손들이 쿠알라룸푸르의 도교 사원에서 경비 및 관리 업무를 보고 있는 경우도 있다.

타밀어는 싱가포르 4대 공용어

인도 남부 타밀 지역의 카스트 계급 가운데 주로 돈을 다루는 체티아르 계급의 상인들 역시 그렇게 자의 혹은 타의로 동원된 인도인들이다. 이들은 주로 싱가포르, 영국령 말라야, 영국령 버마의 도시와 농촌 중심지역에 동원되었고, 주요 업무는 말레이, 버마인들과 같은 현지인들이나 중국계 이주민을 대상으로 한 고리대금업이었다. 현지에서는 주로 체티아르 대부업자(Chettiar Moneylender)로 불렸다. 버마로 이주한 체티아르 상인들의 경우 양곤과 같은 도시지역에서는 중국계 이주민들이나 현지인에게 돈을 빌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최대 도시였던 양곤에는 체티아르 상인뿐 아니라 인도인의 도시라고 할 만큼 인도인들이 많았는데, 1931년 기준 현지인 12만, 인도인 18만, 중국인 3만으로 인도인이 다수 인구를 구성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1920년께 싱가포르의 체티아르 상인. 영국령 인도의 금융기관으로부터 지원받아 자금이 풍부했던 체티아르 상인들은 중국계 이주민뿐 아니라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대부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1932년 싱가포르 중국계 이주민과 인도인 상인 사이에 맺은 대부 계약서. 사진 김종호

체티아르 상인에게 돈을 빌린 이들은 버마의 농촌에도 있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농사에는 돈이 많이 든다. 종자, 비료, 농기구 등을 구입해야 하고, 토지도 빌려야 한다. 농사지을 동안의 생활비, 혹시라도 농사를 망쳤을 경우 다음 수확 시기까지 생활할 비용도 발생한다. 체티아르 상인들은 이러한 자금을 연이율 15~36%로 버마 남부 지역에서 쌀농사에 종사하는 버마인들에게 대출해주었고, 돈을 갚지 못할 경우 토지를 대신 받는 식으로 현지에서 지주가 되었다. 또한 쌀 생산의 중심지였던 남부 지역, 즉 에야와디강 하류의 경우 대규모 인도인 노동자 집단이 부족한 농업 노동자를 충당하기 위해 이주하기도 하였다.체티아르 상인들의 이율이 다른 현지인이나 중국계 상인들보다 낮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영국인의 대리 착취자로 여겨져 버마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에 자극을 주기도 하였다.

1932년 싱가포르에서 중국인 이주민과 인도인 대부업자 사이에 맺어진 대부 계약서에는 이영림(李永林)과 이찬주(李贊周)가 인도 상인 나반나 사나 슌무감 필라이(Navanna Sana Shunmugam Pillay)로부터 129달러를 빌렸고, 이를 86일 안으로 갚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돈을 빌린 날짜인 4월20일부터 129달러를 86일 동안 1.5달러씩 갚고, 이후 연이율 24%에 해당하는 금액을 내야 했다. 달러는 현지에서 통용되던 해협식민지 달러를 가리킨다. 이처럼 중국계 이주민들의 주요 자금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도인 대부업자였고, 그 대부분은 타밀 출신 체티아르 계급의 상인들이었다. 이렇게 돈을 빌린 중국계 이주민들은 초기 정착자금으로 쓰기도 하고, 혹은 자바나 수마트라로 건너가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더 높은 이율로 대부업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체티아르인들은 흔히 상반신을 반쯤 드러낸 민머리 인도인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남부 인도에서 건너간 타밀인들 가운데 체티아르 계급이 아닌 타밀인들의 경우에는 20세기부터 말레이반도를 중심으로 본격화된 고무 농장에 노동자로 동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혹은 싱가포르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도시 하층 노동자 계층을 형성하기도 했다. 그 외에 일부 실론(현 스리랑카) 출신의 타밀인들이 주로 사무직 관료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도 말레이반도와 싱가포르에 남은 인도인 공동체는 대부분 타밀 출신이고, 싱가포르의 경우 타밀어가 영어, 중국어, 말레이어와 함께 4대 공용어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을 정도다.

1890년께 싱가포르의 인도인 커플. 여성의 복장이 전형적인 타밀인 여성의 스타일인 것으로 보아 타밀인 커플로 짐작된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2018년 7월 로힝야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 하킴파라(Hakimpara) 캠프 모습. 콕스바자르/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영국이 심은 비극의 씨앗 로힝야

이러한 영국령 내의 인도인 이주가 일으킨 가장 중요한 비극 가운데 하나가 바로 로힝야(Rohingya) 무슬림들의 이주다. 지금은 미얀마 라카인주(Rakhine State, 여카인이 정확한 발음)지만, 과거에는 아라칸(Arakan) 지역이었던 이곳은 벵골만에 면해 있어 과거부터 불교를 믿는 버마인들과 이슬람교를 믿는 로힝야인들 및 벵골인들이 교류하며 혼거하던 지역이었다. 심지어는 이들을 모두 포함하는 독립왕국이 성립되기도 했다. 콘바웅 왕조 시기 인도에서의 지배를 확립한 영국이 1824년부터 1887년까지 세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버마를 정복하게 되는데, 이 아라칸 지역은 1차 전쟁의 결과로 영국령이 되었다. 애초에 영국은 버마를 영국령 인도의 한 주로 만들 생각이었고, 아라칸 지역 역시 영국령 인도의 일부가 되었다. 영국은 저항의식과 공동체성이 강한 버마인들의 기운을 누름과 동시에 노동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인근의 로힝야 무슬림들을 대거 버마로 이주시킴으로써 비극의 씨앗을 남겼다. 1948년 버마가 독립하고 영국은 물러갔지만, 로힝야인들은 대리 착취자인 인도인을 영국인보다 더 증오했던 버마인들의 축적된 분노를 맞이해야만 했다.

식민 시기 당시 로힝야 무슬림들은 현지의 불교도들을 물리적으로 탄압하는 군대병력이나,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지주계급으로 동원되거나 활동하였기 때문에 버마에서 주요 청산 대상으로 여겨졌다. 초기 아웅산 장군(아웅산 수치의 아버지로 미얀마 독립 영웅)의 구상은 이들을 포함한 소수민족들을 포용하는 버마연방의 성립이었으나 그가 1947년 피살당하고, 이후 군부세력인 네 윈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버마족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하면서 다른 민족을 탄압하고 배제하게 된다. 그중에 식민 시기 버마족들을 억누르기 위해 동원되었던 로힝야인들과 카렌족이 주요 대상이 되었다. 불교를 믿는 버마족과 달리 이들은 각각 이슬람과 기독교를 믿어 이질성이 뚜렷했기에 적대 논리를 만들기가 더욱 쉬웠을 것이다. 이 탄압과 배제의 역사가 21세기까지 계속되면서 지금의 비극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남아시아에는 인도계 민족들이 집단으로 사는 곳이 많다. 싱가포르에는 인도계 타밀족이 많이 살고 있다. 사진은 싱가포르에 있는 힌두교 사원이 스리 마리암만 사원.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영국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배의 유산인 인도인 공동체는 그 출신 지역의 다양성만큼이나 직업 역시 다양했다. 그리고 미얀마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그 후손들의 삶 역시 동화와 이질성 사이에서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김종호 서강대 동아연구소 교수

▶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는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아시아 지역연구의 새 패러다임을 구축하기 위해 40년간 지역연구에 매진해왔다. 동남아시아의 경제·사회·문화적 중요성이 커진 신남방 시대, 연구소는 그동안 연구 성과에 바탕을 두어 멀지만 가까운 이웃 동남아의 다양한 면모를 전한다. 랜선 여행을 하듯이 흥미롭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를 소개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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