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창가를 그린 화가, 그는 어떻게 피카소만큼 위대한 예술가가 됐나

조성준 2021. 6. 26.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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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79]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화가·1864~1901)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

1889년 프랑스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맞는 해였다. 프랑스는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고, 유럽 열강을 초대했다. 만국박람회는 유럽 국가들이 힘을 과시하는 자리였다. 건축, 과학, 조각, 회화, 음악 등 다양한 분야로 국력을 겨뤘다.

이 거대한 행사에 맞춰 탄생한 유산이 에펠탑이다. 에펠탑은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하며 체면을 구겼던 프랑스는 이 거대한 탑을 통해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다. 실제로 만국박람회를 찾은 외국인들은 높이 300m에 달하는 에펠탑 위용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오늘날 에펠탑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위대한 유산이 됐다.

하지만 에펠탑은 탄생 직후 파리의 지식인과 예술가로부터 수모를 겪었다. 에펠탑은 도시 미관을 해치는 괴물 취급을 받았다. 어떤 예술가들은 에펠탑이 꼴 보기 싫다며 파리를 떠났다. 한 소설가는 에펠탑 안에 있는 식당에 자주 갔는데, 거기에 들어가야만 에펠탑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펠탑은 '벨 에포크' 산물로 평가받는다. '벨 에포크'는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이 끝난 1871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약 40년을 '벨 에포크'라고 부른다. 잠시나마 유럽이 평화와 풍요를 누리던 시기였다. 에펠탑은 바로 이 아름다운 시절 한복판에 탄생했다. 건축물 하나를 두고 논쟁하는 것 자체가 평화로운 시대에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에펠탑이 완공된 해에 파리에는 또 다른 유산이 탄생했다. 몽마르트르 언덕에 '물랭루즈'라는 매혹적인 붉은색 건물이 등장했다.

`물랭 루즈의 연기자, 여자 어릿광대 차-우-코`(1895) / 오르세 미술관
◆물랭루즈의 화가

벨 에포크 시대 주요 관심사는 아름다움과 쾌락이었다. 그래서 19세기 말 파리는 예술의 도시이자 환락의 소굴이었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둥지였던 몽마르트르 언덕은 어둠이 깔리면 퇴폐적인 향기가 가득한 붉은색 거리로 옷을 갈아입었다.

카바레, 뮤직홀, 사창가, 술집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했던 곳이 물랭루즈다. 당대 최고의 무용수들을 고용한 물랭루즈는 밤마다 환상적인 쇼를 선사했다. 물랭루즈는 파리의 밤 문화 그 자체였다.

에펠탑을 쏘아붙이던 지식인들은 밤이 되면 근엄함을 벗어던지고 물랭루즈에 가서 기꺼이 최면에 걸렸다. 곧 세상이 멸망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술을 마시며 취하고, 비틀거리며 춤을 추고, 처음 보는 여인과 사랑에 빠졌다. 세기말 파리의 밤은 그런 곳이었다.

이 시기에 '물랭루즈의 화가'로 불리던 예술가가 있었다. 그는 물랭루즈의 터줏대감이자 몽마르트르 여인들의 친구였다. 이 화가는 물랭루즈에서 활동하던 무용수들을 주로 그렸다. 때론 물랭루즈 인근 사창가 풍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도 했다. 파리 뒷골목 삶이 그의 주제였다. 화가의 이름은 툴루즈 로트레크다.

`물랭 가의 응접실`(1894) / 툴루즈 로트레크 미술관
◆버림받은 귀족

툴루즈 로트레크의 풀네임은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 로트레크 몽파'다. 이렇게 이름이 길다는 건 역사가 깊은 가문 출신이라는 뜻이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1864년 프랑스 남부 알비에서 귀족 가문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중세시대부터 대대로 프랑스 남부 지역을 호령하던 명문가였다. 초상류층 가문에서 태어난 도련님은 어쩌다가 파리 뒷골목으로 흘러 들어와 물랭루즈의 화가가 됐을까.

당시 귀족들은 순수 혈통을 유지하는 게 최대 과제였다. 그래서 상류층 사회에선 근친혼이 흔했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부모도 이종사촌이었다. 그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친자매였으니, 대충 이 가문의 족보가 어떤 식으로 유지됐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문명사회가 근친혼을 금기시하는 건 도덕적인 이유뿐 아니라 의학적인 이유도 있다. 여러 세대에 걸쳐서 근친교배가 누적되면 유전병 발병 위험이 커진다. 툴루즈 로트레크가 이 저주를 안고 태어났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태생적으로 허약했고,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훗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 의학계는 이 화가가 '농축이골증'이라는 희귀 유전병에 시달린 게 확실하다고 진단했다. 이 병을 앓는 사람은 조금만 무리해도 뼈가 으스러진다. 그래서 발육에도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툴루즈 로트레크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그런 의학적 지식이 없었다. 아버지는 비실비실한 장남을 마냥 못마땅해했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10대 때 두 차례 골절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하반신이 더 성장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키는 152㎝에서 멈췄다. 그때부터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호전적 인물이었다. 사냥을 즐기고 승마에 열정을 쏟았다. 이 남자는 상반신에 비해 하반신이 과도하게 짧은 장애를 가진 아들을 쳐다보려 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가문의 이름을 물려주는 것도 수치스러워했다. 그는 장남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명문가 또래들과도 좀처럼 어울릴 수 없었다. 야외 활동이 불가능했던 툴루즈 로트레크는 그림을 그렸다. 아버지는 아들의 그림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습작 취급했다.

하지만 어머니만큼은 아들에게서 재능을 봤다. 어머니의 지원으로 그는 열여덟 살에 파리에 가서 당대 최고 화가였던 레옹 보나에게 미술 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에 한 화실에서 동료 화가를 만난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자신처럼 결핍으로 똘똘 뭉친 이 화가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둘은 금세 가까운 사이로 발전한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어쨌든 귀족이었고 부유했다. 반대로 그가 파리에서 사귄 이 친구는 가난한 예술가의 전형이었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틈만 나면 이 궁핍한 화가에게 밥과 술을 사줬다. 이 예술가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다. 세상이 고흐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그의 그림을 거들떠보지 않았을 때도 툴루즈 로트레크만큼은 친구의 그림이 언젠간 빛을 보리라고 확신했다.

`물랭 루즈: 라 굴뤼`(1891) / 베르타렐리 박물관
◆몽마르트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파리의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몽마르트르 언덕에 정착했다. 그곳엔 예술가만 있는 건 아니었다. 술꾼, 부랑자, 외국인, 동성애자, 집시처럼 음지에 사는 사람들이 피난처처럼 몽마르트르에 몰려왔다. 이들은 밤이면 한데 섞여서 흥청망청 취했다. 몽마르트르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아지트이자 뒤꼍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안식처였다.

귀족사회에서 내쳐진 툴루즈 로트레크는 몽마르트르에서는 편안함을 느꼈다. 자신처럼 상처투성이인 사람이 가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곳 사람들은 툴루즈 로트레크의 장애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동료 예술가들은 이 화가가 무엇을 어떻게 그리는가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몽마르트르의 밤도 그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는 어쨌든 돈이 많은 손님이었다. 몽마르트르의 카바레, 뮤직홀, 술집들에 툴루즈 로트레크는 중요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밤의 세계와 사랑에 빠졌다.

그가 몽마르트르에서 정착하고 몇 년 후 물랭루즈가 개관했다. 물랭루즈는 툴루즈 로트레크에게 일감을 의뢰했다. 홍보용 전단을 그려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렇게 '물랭루즈: 라 굴뤼'라는 작품이 탄생했다. 라 굴뤼는 물랭루즈의 간판 여성 무용수였다. 몽마르트르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스타이기도 했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라 굴뤼가 춤을 추는 장면을 그려 전단을 만들었다. 판화 형식으로 제작한 이 포스터는 파리 곳곳에 뿌려졌다.

그는 원근법이라는 서양회화 기본을 가볍게 무시하고, 최대한 간결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도 대담한 색채를 사용해 관객의 관심을 잡아끌었다. 포스터만 봐도 물랭루즈 특유의 나른하고 들뜬 분위기가 전달된다. 이 포스터 덕분에 그는 스타가 됐다. 몰래 포스터를 뜯어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크고 작은 소동이 일어날 정도였다. 작은 키에 지팡이까지 짚어야 했던 이 남자는 몽마르트르에서만큼은 날아다녔다.

`세탁부`(1886) / 개인 소장
◆아름다운 시대가 숨긴 상처

서양 현대미술에선 두 번의 혁명이 있었다. 첫 번째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주도한 혁명이었다. 모네는 수백 년간 이어져온 서양회화의 규칙을 부쉈다. 이제는 신을 그리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화가의 눈에 비친 진짜 세상을 그리겠다고 선언한다.

두 번째 혁명은 피카소가 주도한 입체주의였다. 오랫동안 회화는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인 캔버스 안에 그럴듯하게 담아내는 수단이었다. 원근법이라는 것도 현실을 비슷하게 묘사하기 위해 발명된 기술이다. 하지만 피카소는 이런 관념 자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2차원에서는 2차원만의 문법이 필요하다며 기존 공식들을 폐기했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이 두 개의 혁명 사이에 낀 화가였다. 그는 인상파 선배들이나 입체파 후배들처럼 특정한 사조를 이끈 대부가 아니었다.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렸다.

그럼에도 오늘날 그의 이름이 모네,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유는 그가 한 시대의 진실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는 물랭루즈 화가였다. 물랭루즈는 벨 에포크의 상징 그 자체다. 그래서 툴루즈 로트레크는 벨 에포크 화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름다운 시절'을 대표하는 화가치고는 그의 작품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아름다운 시절답게 물랭루즈에선 밤마다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웃음을 파는 사람과 구매하는 사람이 사는 세계는 전혀 다르다.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몽마르트르 여성들의 얼굴을 보라. 그들의 얼굴엔 옅은 피곤함이 기본값처럼 깔려 있다. 얼굴이 등장하지 않는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의 대표작 '세탁부'에선 한 여성이 양손으로 작업대를 짚고 창밖을 내다보는 중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뒷모습뿐이다. 때론 등이 얼굴보다 많은 말을 한다. 이 여성의 등에선 고달픈 삶에 지친 인간의 영혼이 어른거린다. 창밖을 보면서 그는 어떤 상상을 하고 있을까.

태평성대 속에서도 누군가는 악전고투의 길을 걷는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버림받은 화가도, 그가 그린 여성들도 그런 삶을 살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뒷골목에 들어가 웃음을 팔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은 없다. 어쩌다 보니 삶이 그들을 그곳으로 안내했을 뿐이다. 이것이 '아름다운 시절'이 뭉뚱그린 진실이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이 진실을 집요하게 파헤친 화가다. 세상이 낭만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자세히 뜯어보면 그 안에는 상처의 흔적이 있다.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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