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사형수 이철의 꿈 "이젠 한·일 시민연대 한마당 만들고파"

김종철 2021. 6. 26.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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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토요판] 커버 스토리
'국가 사과' 이끈 재일 양심수 이철
70년대 재일동포 사형수 이철
재일양심수 명예회복 30년 노력
2년 전 '대통령의 공식사과' 결실
성찰 담은 회고록 '장동일지' 출간
"당국간 한·일관계 악화할수록
시민들의 연대와 교류가 중요
옛 서대문구치소 앞마당에서
양국 시민 민주음악회 열고 싶어"
“재일동포 간첩 피해자들 중 재심을 아직 신청 안 한 사람들이 한 사람보다도 훨씬 많아요. 문재인 대통령이 2년 전에 그 문제에 공식 사과도 하셨으니, 피해자들의 소재를 찾는 데, 주일 한국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 이들을 찾는 데 적극 나서주면 좋겠어요.” 2년 전 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에 대한 ‘국가 사과’를 이끌어낸 이철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장이 지난 17일 오전 일본 오사카 코리아타운에서 우산을 든 채 잠시 포즈를 취했다. 오사카/김봉섭 사진가 bongsub30317@gmail.com
▶ 딱 2년 전 재일동포 사회는 깜짝 놀랐다. 그해 6월27일 저녁 오사카에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의례적인 인사말이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 진심으로 사죄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며 재일동포 조작간첩사건 피해자 및 가족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 고국에서 간첩으로 몰리고 조작됐던 재일동포는 모두 130여명에 이르지만, 대한민국은 그동안 목소리 내기 힘든 이들을 사실상 외면해왔다. 국가를 대표한 대통령의 사과가 저절로 나온 것은 아니다. 피해자 당사자들의 오랜 명예회복 투쟁의 결과였다. 그 중심에는 지난 30년 동안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장으로 일해온 이철씨가 있다. 그는 한국 유학 도중인 1975년 간첩으로 조작돼 사형선고를 받고 13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출소 뒤에는 또 13년간 한국 입국을 거부당했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재일동포의 권익 옹호와 한·일 시민연대의 구심점 구실을 꾸준히 해왔다. 그가 홀로 간직해왔던 수난 기록을 책으로 펴냈다. 지난 17일과 18일 두차례 화상으로 이씨를 인터뷰했다.

퇴근길 전철에서 틈틈이 적었다. 점심 뒤 짧은 휴식시간에도 노트를 펼쳐서 짧게는 7년 전, 길게는 20년 전의 일을 차근차근 기록했다. 너무나 사랑하는 조국에서 겪은, 꿈에서조차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었기에 기억세포에 단단하게 각인된 걸까. 모든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살아났다.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장 이철(73·호칭 생략)이 1975년부터 88년까지 한국에서 겪은 억울한 징역살이 등 고초를기록한 것은 1995년이었다.

“큰아이가 6살, 작은아이가 4살이었어요. 어느 날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저나 집사람이 갑자기 죽으면 아이들이 부모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예요. 기억이 남아 있을 때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해 8월부터 이듬해 연말까지 두툼한 노트 7권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는 이 노트를 책상 서랍 깊숙이 보관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자녀가 열어볼 가족만의 유고록이 될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 기록이 작성 26년 만에 회고록 <장동일지: 재일한국인 이철의 옥중기>로 세상에 나왔다. <장동일지>(長東日誌)는 27일 일본 전역의 서점에 배포되며, 26일 오사카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긴 옥살이 끝에 1988년 10월 13년 뒤늦게 결혼식을 올렸던 이철, 민향숙씨가 지난 17일 일본 오사카 코리아타운 인근의 한 카페에서 다정하게 손을 맞잡고 있다. 오사카/김봉섭 사진가
결혼을 몇달 앞둔 1975년 12월에 중앙정보부에 체포돼 간첩으로 조작됐던 재일동포 유학생 이철씨와 민향숙씨의 약혼 사진. 이철 제공

고문 못 견뎌 혀 깨물고 자결 시도

―원고는 오래전에 썼는데 책 출간은 뒤늦게 이뤄졌어요.

“책으로 낼 생각이 그동안에는 조금도 없었어요. 부끄러운 과거를 사람들 앞에 내놓는 것이 창피했고, 아픈 상처를 떠올리는 것도 여러가지로 괴로웠거든요. 그렇지만 이제는 이런 것을 공유해도 괜찮지 않겠나 싶어요. 제 나이도 이제 70이 넘었는데 숨겨둘 게 뭐가 있겠어요.”

―아이들을 위한 기록이었으니까 자녀는 원고를 읽어봤겠죠?

“원래 내가 죽고 난 뒤에 읽어보라고 쓴 기록이어서 여태까지는 안 보여줬죠. 책이 나오면 너희들도 한번씩 읽어봐야 한다는 얘기만 해뒀어요.”

―반응이 어떨지 궁금한데요.

“내가 징역살이를 했다는 건 아는데 거기서 그렇게 비참하게 당한 걸 보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저도 궁금합니다. 그걸 보고 아버지에 대한 애잔한 마음이 더 생길지 모르겠어요.”

―평상시에도 자녀들이 선생님 부부를 존경하는군요.

“둘 다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우리 아버지를 존경합니다’라고 했어요. 커서도 계속 그렇게 이야기해서 제가 ‘그러지 마라. 그런 소리 하면 아버지가 부끄럽다’고 하면 애들은 ‘존경하는데 거짓말을 하면 안 되잖아요’라면서 지금도 어디서든 ‘부모님을 존경한다’고 얘기합니다.”

오는 27일 일본에서 출간되는 <장동일지>.
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인 이철씨가 1995년 대학노트에 펜으로 직접 쓴 <장동일지>의 원본. 이철 제공

―어떤 면에서 그렇게 존경한대요?

“가정에서도 늘 좋은 아빠와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으니 그런 점을 아이들이 안 거 같고요. 그리고 제가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를 30년 가까이 해왔는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그런 모임에 같이 갔는데 제 친구들이 저를 많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 아버지가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또, 저와 집사람이 나쁜 일 해서 감옥살이한 게 아니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해서 감옥살이하게 됐다는 걸 알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유학 중이던 이철은 1975년 12월11일 이른 아침에 하숙집이자 약혼자인 민향숙(70)의 집에서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의 지하 조사실로 끌려갔다. 사건 발생은 12월이었으나 11·22사건의 연장이었다. 11·22사건은 그해 11월22일 중앙정보부의 대공수사국장 김기춘이 “모국 유학생을 가장해 학원에 침투해서 암약한 간첩을 검거했다”며 21명의 명단을 발표한 날짜에서 이름이 붙었다. 11월22일 1차 구속자 21명 가운데 12명(이 중 1명인 김삼랑은 가공인물로 나중에 드러남)이 재일동포였으며, 12월 추가로 체포된 6명도 재일동포 유학생이었다. 박정희 유신독재를 지탱하기 위해 75년 5월 선포한 긴급조치 9호에도 불구하고 대학가 등에서 유신 반대 시위가 거세지고 있던 때였다. 민주화운동에 타격을 주기 위해 취약한 재일동포 유학생들을 희생양 삼은 공안조작 사건이었다.

독재정권의 앞잡이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와 군 보안사령부(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전신)가 생사람을 간첩으로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악독한 고문을 이기는 장사는 없는 법이다. 이철도 끌려가자마자 발가벗겨진 채 온몸을 구타당했을 뿐 아니라 정좌한 상태에서 무릎 안쪽에 각목을 끼워 발로 짓밟기, 잠 안 재우기 등 갖은 고문을 당했다.

“짐승 같은 무리들은 공포로 작아진 내 성기를 잡고 담뱃불로 지지려 하면서 ‘네 상부를 얘기하라. 솔직히 말하지 않는다면 네 약혼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이곳에 데려와 발가벗기고 네 눈앞에서 범하고 말겠다’고 위협했다. 나는 그것만은 말아달라고 애걸했다.”(<장동일지>)

간첩이 되지 않고서는 살아서 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한 이철은 조사 도중 수사관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혀를 깨물어 자결을 시도했다. 그마저 곧 발각돼 실패로 돌아가자, 의지할 데도 상의할 이도 없는 그에게 남은 길은 자포자기밖에 없었다. ‘네가 바른대로 말하면 곧 돌아가게 해주겠다. 재일동포여서 평양에 갔다 왔다고 해도 재판만 받으면 곧 풀려난다. 재판은 요식행위다. 풀려나서 빨리 결혼해야 할 것 아니냐’는 말이 달콤하게 들렸다. 당시 그와 민향숙은 결혼식을 두달여 앞둔 상태였다. 그들이 말하는 ‘바른대로’는 시키는 대로 거짓 자백을 하는 것이었다. 이철은 그들이 부르는 대로 평양에 두번 갔다 왔다는 등의 진술서를 쓰고서야 39일 만에 지하 조사실을 벗어날 수 있었다.

1978년 3월 이철구원회 회원들이 이철 사형 확정 1년을 맞아 구마모토시에서 규탄집회를 한 뒤 그의 사형집행 저지를 요구하는 펼침막을 들고 시내를 행진하고 있다. 이철 제공
대전교도소 서화반 활동을 같이 했던 신영복(오른쪽)씨와 1984년 찍은 기념사진. 이철 제공

평양 갔다던 때 일본 체류 증거 외면한 2심

―정말 말이 안 되게 사형수가 됐어요. 조작된 혐의 사실을 1심 법정에서 인정했던 게 패착이 아닌가 싶어요. 인정하면 풀어주겠다는 말을 믿었나요?

“100% 믿었다고 하면 좀 뭐하지만, 이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이야기했으니까 선처해주지 않겠냐는 생각은 했었죠. 부끄럽지만, 그때는 그걸 믿었죠.”

―그들의 회유에 속았던 거군요.

“네, 저는 민향숙이 잡혀 온 것도 몰랐어요. 민향숙도 처음에는 ‘두 사람이 진술을 똑같이 맞춰야 이철이 빨리 풀려난다’는 저들의 말을 믿었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쓴 진술서를 보여주니까 그것에 맞춰서 진술을 했죠.”

민향숙도 간첩방조죄로 1심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다.

―2심 재판부터는 허위 자백을 폭로하면서 진실을 밝혔는데 계기는 뭐였어요?

“(한숨) 우리 어머니의 질타가 가장 컸어요. 1심 재판이 끝난 뒤에야 가족 면회가 이뤄졌어요. 일본에서 오신 어머니가 ‘일본 친구들이 열심히 구원활동을 하면서 너를 도와주고 있는데 네가 맞습니다, 예 맞아요, 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 진실을 말하라’고 되게 뭐라고 하셨어요. 그렇잖아도 저도 1심 사형선고를 받고는 이대로 3심까지 사형으로 가는 거 아닌가 싶어서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까 정신이 번쩍 드는 거예요. 그때부터 용기가 차츰 생겼어요.”

이철 가족은 오사카의 자형(김수현) 회사에서 아르바이트한 월급명세서와 구마모토의 아버지 회사에서 임시감독으로 작성한 ‘현장 일지’, 구마모토의 한 백화점에서 구매한 시계의 보증서 등 평양에 갔다는 시기에 일본에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물증들을 찾아서 2심 법정에 제출했다. 새로 선임된 박세경 변호사가 원심 파기를 기대했을 정도로 고무적인 법정 투쟁이었지만, 결과는 2심도 사형이었다. 민향숙도 3년6개월 실형을 받았다. 77년 3월 대법은 2심 판결 그대로 두 사람의 형을 확정했다. 당시는 사형 집행이 자주 있는 때여서 언제 사형장으로 끌려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당당하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1979년 8월15일 무기 감형을 통보받기 위해 아침 일찍 불려 나갈 때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줄 알았던 그는 같은 방에 있는 사람들과 차례로 작별인사를 나누며 “밖에 나가거든 내 얘기를 해주세요”라고 말했다.

―억울하고 분해서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담담하게 생활할 수 있었어요?

“억울해봤자 다른 방법이 없으니 자기최면을 걸 수밖에 없죠. ‘어차피 나는 여기서 죽어야 되는 모양이다. 죽을 바에는 남자답게 죽자’고 생각한 거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죄도 없이 죽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선배들을 나도 따라가게 됐구나, 할 수 없다고 체념했죠.”

이철은 1948년 구마모토현 구마군에서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선가게와 과일가게, 파친코 등의 사업을 했던 아버지는 구마군과 인근 히토요시시에 사는 재일동포들을 모아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 히토요시지부를 만들어 지부장을 오래 했다. 경북 의성이 고향인 아버지는 반공주의자였으며, 북한을 싫어했다. 아버지는 이철의 구속에 쇼크를 받아 그와 민향숙이 서울구치소에 가던 날 숨졌으며, 어머니도 1980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구마모토에서 초·중·고를 졸업한 이철은 1967년 도쿄의 주오대 이공학부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코리아문화연구회’라는 동포학생 모임에 참가하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갔다. 그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통명(일본식 이름)을 버리고 학생증을 이철로 바꿨다. 주오대의 코리아문화연구회는 한국계의 ‘한국문화연구회’와 북한계인 ‘조선문화연구회’가 오래전에 통합돼 만들어진 단체였다. 당시 일본 대학가는 유럽과 미국 등 서구의 ‘68혁명’ 분위기로 인해 학생운동이 활발했으며, 사회주의 사조도 유행했다. 이철도 사회주의 서적이나 북한 관련 책들을 더러 읽었지만, 2학년 때 한국 유학을 생각하면서부터는 코리아문화연구회에도 나가지 않았다. 혹시 한국에서 문제될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2년 전 문 대통령 공식사과로
재일동포 피해자들 한 많이 녹아
특별법·재심 추진에 정부 나서야
한통련 문제도 문 정부 때 해결을”

75년 고려대 유학중 남산 끌려가
고문으로 간첩 돼 13년간 옥살이
약혼자도 간첩방조죄 3년반 투옥
일본서 동포 통합·시민연대 앞장

고리키의 ‘어머니’처럼 변한 장모 조만조

―유학 오기 2년 전인 71년에 재일동포 유학생 서승, 서준식 형제가 간첩으로 몰려 크게 문제가 됐죠. 그런 일을 보면서 두렵지 않았어요?

“물론 재일동포가 그렇게 걸려 간첩으로 발표되면 겁나죠. 근데 설마 그런 일이 저랑 연결되리라고는 상상을 못 했죠. 우리는 민단 집안으로 북한 쪽인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과는 관계가 없어 안심하는 마음도 있었고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왜 한국에 오려고 하셨어요?

“당시에는 재일동포들에게는 대학을 졸업해도 직장이 오픈돼 있지 않았어요. 심지어 도쿄대 대학원까지 나온 재일동포 형제가 취직을 못 해 야키토리(꼬치구이) 장사를 하기도 했어요. 공적인 기구나 대기업에는 취직 자체가 안 됐어요. 아무리 노력해봤자 희망이 없으니 조국에 가서 공부하고 일하자는 마음이었죠. 민단에서도 재일 청년들에게 유학을 권했고요.”

이철 역시 어릴 때 조센진이라는 모욕을 듣는 등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 중1 때 같은 반 아이에게 뾰족한 연필로 손바닥을 찔렸는데 부러진 연필심은 지금도 그의 손바닥에 까맣게 남아 있다. 차별을 피해 한국에 온 이철은 간첩으로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너희 때문에 우리까지 피해를 본다”는 눈총과 따돌림을 받았다.

1980년 말 대전교도소에 있을 때 사회참관을 나가 약혼자인 민향숙(가운데)과 장모 조만조씨와 함께한 이철씨. 이철 제공

그러나 이철은 감옥살이를 하면서 점차 자존감을 회복해갔으며, 교도소의 부당한 대우에 맞서 여러차례 옥중 투쟁도 주도했다. 1985년 당시 악독하기로 소문난 대구교도소를 상대로 재소자들이 처절하게 싸워서 승리했던 ‘7·31 대구교도소 항쟁’이 대표적이다. 다른 곳에서는 허용되는 도서 반입이 금지되고 정치범들을 일부러 좁은 방에 과밀 수용하는 등의 횡포를 부리는 처사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재소자 18명이 엄청난 폭행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싸워 마침내 이겼다. 독재정권 시절 옥중 투쟁사에 기록될 영광의 한 페이지다. <장동일지>에는 대구교도소 투쟁의 전말이 자세하게 기록돼 있다.

그가 이처럼 감옥 안에서 싸울 때 밖에서 민향숙과 장모인 조만조(2005년 작고)도 민주투사로 거듭났다. 경북 경산의 과수원 집 여주인으로 조용히 살았던 조만조는 사위의 고난을 겪으면서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처럼 세상에 눈떴다. 그는 이소선, 박용길 등과 함께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의장을 지냈으며, 민향숙도 인재근, 조무하(장기표 부인) 등과 함께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다. 1988년 10월 개천절 특사로 이철이 석방된 직후 두 약혼자는 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문익환 목사 등 많은 민주인사의 축복을 받으며 13년 만의 지각 결혼식을 올렸다.

―출소한 뒤에 원래는 한국에서 살 계획이었다고요?

“네. 정치적 민주화가 막 시작된 때여서 한국이 변하는 시대가 오지 않았습니까. 그 변화의 목격자가 되고 싶었고, 민주화운동에도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감옥 가기 전에는 (민주화운동을) 못 해봤던 게 유감이었는데 출소했으니 과거에 못 했던 것을 하면서 살고 싶었어요. 그리고 감옥 생활 하면서 친구와 동료들도 많이 생겨서 굳이 일본에 돌아갈 이유가 없었죠.”

―조국에 대한 사랑인가요?

“당연하죠. 재일동포라는 꼬리표를 떼고 사랑하는 고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사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어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조작 피해자인 이철씨는 13년여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뒤인 1988년 10월 명동성당에서 민향숙씨와 ‘지각’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직후 명동으로 축하 행진에 나서는 모습. 민주화기념사업회 제공, 사진 박용수

그러나 한국 정부는 결혼식 후 인사차 일본에 잠시 다니러 간 이철에게 여권 발급을 해주지 않음으로써 입국을 막았다. 후쿠오카와 오사카 총영사관에 항의해도 소용없었다. 이제 이철은 일본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오사카 자형의 전기회사에서 낮에는 전기공사 등의 일을 했으며, 밤에는 재일동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민향숙은 김치공장의 노동자로 일하고, 딸과 아들이 다니는 보육원의 주방일 등을 했다. 바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두 사람은 오히려 한국의 동지들을 걱정했다.

“아이들이 생기고 가정을 꾸리면서 둘이 그런 말을 늘 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도 되나.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감옥에 있고 고생하는데 우리만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고 말입니다. 13년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함께 있는 시간들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졌어요.”(민향숙)

“문익환 목사님이 결혼식 때 시간을 금싸라기처럼 여기면서 살라고 했어요. 정말 그런 마음으로 살았어요.”(이철)

“한통련은 훈장 받아야 할 사람들”

그런 속에서도이철은 1991년 동지들을 규합해 오사카에서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를 만들었다. 재일동포 간첩사건 피해자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의 시작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문제뿐 아니라 한국의 양심수 석방과 민주화를 위한 지원, 북한 수해피해 돕기, 일본 양심세력과의 연대 등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이철은 더 요시찰 대상이 됐고, 김대중 정부 때인 2001년 8월에야 출국한 지 13년 만에 입국이 허용됐다.

재일동포 간첩 조작 피해자 이철(꽃다발 든 이)씨가 2015년 2월 재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뒤 부인 민향숙씨와 함께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다. 왼쪽 아래는 민청학련 사형수였던 이철 전 국회의원.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노무현 정부 때 진실화해위원회를 거쳐 재심의 길이 열렸을 때 처음에는 재심을 안 하려고 했다고요?

“네. 개별적인 재판을 통해서 무죄 판결을 받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보고 재심에는 앞장서지 못하겠다고 했죠. 재일동포 사건은 발생 시점과 내용이 살짝 다를 뿐 사실상 같은 것이거든요. 특별법을 만들어 한꺼번에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석태·장경욱 변호사님 등 재일동포 문제 해결을 돕는 분들이 2011년 3월에 일본에 와서 ‘재일동포 피해자들을 위한 특별법을 만들어서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 이상적이고 맞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받았던 사람들이 나서서 무죄를 받아야 그런 법 제정에도 힘이 실리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하더군요. 일리 있는 논리여서 재심에 동의했죠.”

―1975년 사건 발생 이후 40년 만인 2015년에 재심 무죄가 됐는데 심경이 어땠어요?

“무죄 소리가 반갑기는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가을바람이 부는 것처럼 허망하고 아쉽고 그랬어요. 13년 동안의 억울하고 억압된 삶에 대해서 무죄라는 두 글자로 땅땅 선고를 하는데 좀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는 개인적인 신원에 그치지 않았다. 재일동포 간첩사건 해결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재일 양심수들의 상처 치유를 위한 ‘대한민국의 사과’를 꾸준히 요구했다. ‘힘없는 재일동포들의 얘기를 누가 들어주겠느냐’며 회의적인 반응이 많았지만, 그는 우직하게 기회 있을 때마다 목소리를 냈다. 마침내 2019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이 오사카에서 한 동포간담회에서 “독재권력의 폭력에 깊은 상처를 입은 재일동포 조작간첩사건의 피해자와 가족 여러분께 대통령으로서 국가를 대표해 진심으로 사죄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밝혔다.

―문 대통령의 공식 사과가 이뤄진 역사적 현장에 있으셨죠?

“행사 며칠 전에 간담회에 초청됐다는 얘기를 듣고는 대통령이 우리를 위해서 한마디 해주시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은 있었지만, 어떤 말이 나올지는 전혀 몰랐어요. 말씀 도중에 갑자기 ‘억울하게 잡힌 재일동포들’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깜짝 놀랐어요. 저희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말씀이어서 ‘아이고, 내가 듣고 있는 말이 진짜인가’ 하면서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어요.(웃음)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데 그때서야 속이 좀 후련하게 느껴졌어요. 그 전해 연말에 제3회 김근태상을 저희 양심수동우회가 받았을 때도 가슴이 찡했어요. 저희가 한국의 동지들한테 같은 동지의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구나 싶어서 흐뭇한 마음으로 돌아왔거든요. 물론 앞으로 기념하고 기억해야 할 것도 많고 아직까지 명예회복이 안 된 사람들도 많아서 다 끝난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이 사과를 했으니 저희로서는 그동안 마음속에 뭉쳐 있던 한이 녹았다고 할까요.”

130여명으로 추정되는 재일동포 간첩사건 피해자 가운데 현재까지 36명이 재심 무죄가 확정됐으며, 3~4건은 재심이 진행 중이다.

―재일동포 사건은 아직까지 3분의 1도 재심이 이뤄지지 못했는데요.

“아직도 한국의 사법시스템을 믿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 또 어떤 분들은 과거의 상처를 다시 꺼내는 것 자체를 싫어해요. 피해자들의 소재를 아예 모르는 경우도 많고요. 대통령이 공식 사과했으니 주일 대사관이나 영사관에서 이들을 찾는 데 적극 나서주면 좋겠어요. 코로나가 끝나면 특별법 제정에도 본격적으로 나설 계획입니다. 한국에 가서 국회나 시민사회에 왜 특별법이 필요한지 호소를 하려고요. 지금이 좋은 찬스잖아요. 여권이 국회 의석 300석 가운데 180여석을 가졌는데 지금 못 하면 기회가 다시 올까요?”

―한국에 와서 고통받고 피해를 입은 분들도 있지만, 일본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피해를 입은 동포들도 있잖아요.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 대표적인데요.

“한통련은 정말 억울하게 살아왔죠. 이분들이 일본 땅에서 정말 한국 민주화를 위해서 열심히 했는데, 한국의 독재정권은 이들을 오히려 반국가단체로 규정을 해버렸어요. 그것 자체가 너무 엉터리예요. 훈장을 줘야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박해해서야 되겠습니까? 한통련 사람들이 북한 지시와 돈을 받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얘기입니다. 제가 볼 때는 사실무근이에요. 그들은 민단에 속했던 사람들인데 민단이 자꾸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기 때문에 재일동포의 권익을 위해 자율적으로 활동하자고 했던 사람들이거든요. 그들이 무슨 빨갱이입니까. 문재인 정부가 남은 1년 동안에 한통련 명예회복 문제도 꼭 풀었으면 합니다.”

한통련은 민단의 민주화를 추진했던 개혁파들이 1973년 당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초대 의장으로 추대해서 만든 재일동포 단체다. 박정희 정권은 1977년 재일동포 김정사를 고문으로 간첩으로 만들면서 아무런 증거나 특별한 조사도 없이 한통련을 배후로 몰았다. 2011년 김정사는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법원은 한통련에 대한 판단을 아예 회피했다. 이 때문에 한통련 간부들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부터 또다시 여권을 발급받지 못해 입국 금지나 제한을 받고 있다. 지난 4월 국가인권위원회는 한통련 관계자들에 대한 여권 발급 거부 및 제한 조치를 개선하라는 권고를 외교부에 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이철-민향숙 묵주

―재일동포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 정부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다른 문제는요?

“재일동포 전체 입장에서 꼭 요청드리고 싶은 것은 총련 계열의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입니다. 조선학교가 일본 정부의 지원을 못 받아서 지금 경제적으로 엉망이거든요. 지금까지는 학부모들의 힘으로 겨우 살아남았는데 이제 한계에 와 있어요. 북한은 지금 힘이 없으니까 대한민국 정부가 조선학교를 살리면 좋겠어요. 한국 정부가 과감하게 나서 지원금을 내겠다고 하면서 조선학교에 민족교육을 더 잘하라고 요구하면 그들도 받아들일 것이고, 일본 정부도 조선학교를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조선학교는 북한과의 연관성 때문에 역대 한국 정부가 관여를 안 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총련계가 운영하는 학교여서 그랬는데 사실은 거기에 학생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총련계뿐이 아니고 민단계도 있어요. 제대로 된 민족교육은 거기밖에 안 하거든요. 민족교육의 마지막 보루가 조선학교인데 총련하고는 어느 정도 독립돼 있는 교육기관이라고 봐도 될 거예요. 옛날식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몇년 전 직장일을 관둔 이철은 재일동포의 권익 옹호와 통합, 일본 시민사회와의 연대에 앞장서느라 요즘 더 바쁘다. 지난해부터는 ‘오사카 우리민주연합’의 대표도 맡았다. 우리민주연합은 한국에서 새로 일본에 건너온 뉴커머들이 만든 독립적인 시민단체다. “재일동포 사회의 중간다리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회원들의 요청과 단체 취지에 공감해서다.

“제가 아직 이루지 못한 소원이 하나 있어요. 서대문구치소(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앞마당에서 한국 시민들과 일본에서 구원운동 한 분들이 함께 어울리는 자리를 만드는 일입니다. 그곳에서 음악회를 열어 일본의 구원운동에서 나왔던 노래와 한국의 민주화운동 때 나온 노래를 양국 시민들이 함께 부르는 것을 보고 싶어요. 한·일 양국 관계가 풀릴 기미가 별로 안 보이지만, 이런 때일수록 시민사회의 민주 연대가 중요하잖아요.”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재일동포 전시실에는 이철과 민향숙의 묵주가 보관돼 있다. 1977년 3월 민향숙이 광주교도소로 이감되기 직전 교도관을 통해 서로의 것을 교환해 간직해왔던 묵주다. 사랑의 징표이자, 두 사람이 추구한 민주와 자유의 상징이다. 코로나가 끝나면 그 묵주 앞에 선 두 사람과 한·일 양국 시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번에도 이철은 해낼 것이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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