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 6·25 참전하려 더 낮은 계급장 달았다”

파리/손진석 특파원 2021. 6. 26.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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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몽클라르씨./손진석 특파원

6·25전쟁에 프랑스군을 이끌고 참전한 랄프 몽클라르(1892~1964) 장군의 아들 롤랑 몽클라르(71)씨는 지난 21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의 자택에서 “70년이 지났는데도 한국인들이 아버지를 기억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당신이 몽클라르 장군 아들이냐’며 제 손을 꼭 잡아주죠. 그러면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느껴집니다.”

몽클라르 장군은 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6·25가 벌어지기 직전 프랑스 외인부대를 이끈 중장(中將)이었다. 그는 프랑스 정부가 6·25에 대대 규모로 파병을 결정하자 참전을 위해 자청해서 네 단계 낮은 중령 계급장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6·25가 발발했을 때 아들 몽클라르씨는 생후 5개월이었다. “1·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한 아버지는 나치와 맞서 싸운 것을 계기로 공산주의 세력을 악으로 보고 박멸해야 한다는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어요.” 그는 “어머니가 갓 태어난 나를 두고 전쟁터에 가지 말라며 반대했지만 아버지 뜻을 꺾지는 못했다”며 “자유를 지키려 계급까지 낮춘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몽클라르 장군은 1951년 2월 경기도 양평에서 벌어진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중공군에 맞서 유엔군이 이긴 첫 번째 전투로 38선을 회복하게 된 계기였다. 몽클라르씨는 “올해 지평리 전투 70주년이 됐다는 얘기를 듣고 있어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그립다”고 했다. “아버지는 한국인들을 좋아했어요. 제가 어릴 적 아버지는 한국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람들은 얼마나 성실하고 예의바른지 여러 번 말씀하셨죠. 겨울이 혹독하게 추워서 총을 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손가락이 얼어붙었다고 회상하시던 장면도 제 기억 속에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는 1차 대전부터 6·25까지 부상을 스물여덟 번 입었다”며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니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아버지 말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다”고 했다.

그는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에서 전쟁 중이던 1950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줬다. 생후 11개월짜리 아들이 후일 글을 깨친 후 읽어보라며 쓴 일종의 기록물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너는 내가 (한국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중략) 너와 같은 어린 한국의 아이들이 길에서, 물속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려고 아버지는 여기 왔단다.”

그가 중학생일 때 몽클라르 장군은 별세했다. 대를 이어 군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는 군인 월급이 적어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기 여의치 않아 포기했다. 은행에서 쭉 일하고 임원으로 은퇴했다. 몽클라르씨는 스물한 살 늦둥이 대학생 아들을 뒀다. 그 아들이 장교가 되기로 정했다고 했다. 그는 “할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결심한 아들이 자랑스럽다”며 “6·25전쟁 때 가난하던 한국이 지금은 손꼽히는 부자 나라가 됐다. 몽클라르 장군의 아들로서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했다. 몽클라르씨의 아들은 최근 프랑스의 6·25전쟁참전용사협회에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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