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몰락 묘사한 정치극, 현실처럼 웃지 못할 코미디죠
'셰익스피어 비극'으로 무대 복귀
"현대인 고독 폭넓게 다루고 싶어"
삶 그리는 연극은 여행이자 축제
관객과 깊이 있는 만남 고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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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연극 ‘코리올라누스’ 연출 양정웅
사람이 공간을 짓지만, 공간이 사람을 키우기도 한다. 2000년부터 서울 역삼동에서 세계 공연예술의 최전선을 소개하며 예술인들에게 영감을 주던 LG아트센터가 내년 마곡으로 이전한다. 역삼동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기획 공연 ‘코리올라누스’(7월 3~15일)를 만드는 건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 총연출로 유명한 양정웅(53)이다.
둘의 인연은 길고 깊다. LG아트센터가 초창기였던 2004년 기획한 ‘오늘의 젊은 연극인 시리즈’의 첫 번째 선발자가 양정웅이었고, 2009년 그에게 대한민국연극대상과 연출상을 안긴 ‘페르귄트’를 제작한 것도 LG였다. “제게 아주 특별한 공간이에요. 젊은 시절 파격적으로 발탁해줘서 ‘멕베스’를 동양적 이미지극으로 만들 수 있었고, 2006년 런던 바비컨센터 가기 직전에 ‘한여름밤의 꿈’을 올린 것도 여기였죠. 그때 저희 극단에 1년간 리허설룸을 무료로 빌려주기도 했고요. ‘페르귄트’도 여기서 6개월 이상 연습해서 큰 상도 받고, 해외 페스티벌에 초청도 많이 받았죠. 훌륭한 해외 연출가들 작품을 볼 수 있는, 연극인들에겐 꿈 같은 장소였는데, 제가 클로징까지 하게 되어 영광이네요.”
LG아트센터 내년 마곡 이전, 마지막 무대
‘코리올라누스’는 국내 최고의 ‘셰익스피어 스페셜리스트’로 꼽히는 그가 9번째로 도전하는 셰익스피어로, 한국적 미장센을 내세웠던 전작들과 달리 영웅의 몰락과 계급 갈등을 첨예하게 묘사한 정치극이다. 이미지보다 이야기가 앞선다는 얘기다. “이번엔 인물에 집중하고 있어요. 전부터 코리올라누스라는 캐릭터에 매료돼 있었거든요. 신념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인물이죠. 조국 로마를 사랑한 전쟁 영웅인데, 시민의 버림을 받고 원수와 손을 잡지만 가족에게 발목 잡혀 결국 원수 손에 죽임을 당하는 이야기가 느와르 영화처럼 흥미진진합니다.”
귀족인 영웅이 시민과 화합하지 못해 조국에 버림받고 숙적과 결탁해 복수를 꿈꾼다니 현실 정치판이 떠오르지만, 그는 “셰익스피어는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면서 직관적인 해석을 경계했다. “민주주의가 태동하고 계급 대립이 심했던 격변의 시기를 다루고 있으니 우리가 처한 좌우갈등이나 ‘기생충’ 같은 빈부격차 문제도 은유적으로 떠오르겠죠. 하지만 미얀마, 시리아에도 해당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문제예요. 코리올라누스가 영웅이면서도 조국과 가족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되는 모습이 카프카의 『변신』처럼 현대인의 고독을 내포하고 있죠. 그런 부분까지 폭넓게 다루고 싶어요.”
마냥 심각하기만 한 무대는 아니다. T.S. 엘리엇과 버나드 쇼가 각각 “셰익스피어 비극의 최고점”“셰익스피어의 가장 위대한 희극”이라고 평한 이유를 특유의 유머 코드로 풀어낸다.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가 비극으로 보이는 것처럼, 코리올라누스가 처한 잔인한 현실도 웃지 못할 코미디거든요. 한 장면은 아예 막간극처럼 코믹하게 풀 겁니다. 셰익스피어에는 그런 요소가 꼭 있거든요.”
남다른 예술적 DNA를 타고난 건 그도 마찬가지다. 소설가인 양친이 연극·영화 애호가였던 영향으로 한때 영화감독을 꿈꾸고 미대 입시를 준비하기도 했었다. 연극에 투신한 건 고1 때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본 ‘리어왕’에 압도됐기 때문이다. “당시 연극은 입석이 있었어요. 만원 전철처럼 발 디딜 틈 없는 속에서 간신히 본 ‘리어왕’의 쩌렁쩌렁한 에너지에 충격을 받았는데, 셰익스피어의 이야기 자체가 재밌어요. 사실 요즘 인기 있는 컨텐트도 대부분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았거든요. 미드 ‘왕좌의 게임’도 너무 좋아하는데, 딱 셰익스피어예요. 셰익스피어가 원형이고 기본인 거죠.”
미드 ‘왕좌의 게임’도 셰익스피어가 원형
극단 이름이 ‘여행자’일 정도로 방랑 기질도 타고났다. 1994년부터 2년간 스페인에 본거지를 둔 다국적 극단 라센칸에 들어가 해외를 떠돈 그다. “방랑 예술가들 자서전을 읽으며 집시 같은 삶을 동경했는데, 외국팀이 한국에 와서 워크숍을 한다길래 오디션을 봤죠. 거기서 만난 친구들과 스페인·일본·인도 등에서 연극을 했고, 그런 경험 덕에 문화인류학적 접근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경계 없는 교감이 가능한, 문화와 문화를 넘나드는 연극을 하고 싶었거든요.”
여행에는 여독이 따르기 마련이다. 바비컨과 글로브 씨어터, 올림픽 등 ‘큰 여행’ 후에는 꼭 슬럼프가 찾아왔다. “2008년에 처음 슬럼프가 왔어요. 꿈의 무대에 서고 나니 창작에 고민이 생기더군요. 이벤트 연출 알바나 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LG의 제안으로 ‘페르귄트’를 만났죠. 알바도 접고 여기 연습실에서 6개월을 지내며 살아났어요. 올림픽 이후에도 비슷했는데, 늘 멍 때리고 있는 걸 건져준 게 LG였네요.”
어려서부터 독일 현대연극의 아버지 막스 라인하르트의 총체극을 동경해 왔던 그에게 올림픽 개막식은 거대한 연극이었다. 안무가 필립 드쿠플레가 연출한 92년 알베르빌 올림픽 개막식의 한바탕 서커스 축제를 봤을 때부터 꿈을 키웠다. “딱 책에서 봤던 라인하르트 총체극의 현대 버전이다 싶더라고요. 외도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제겐 다 하나였고, 제가 하고 싶은 ‘연극’이었을 뿐이에요. 이벤트 연출 알바 경험도 다 도움이 됐죠.(웃음)”
3만 5000명이 보는 최대 스케일의 공연인 동시에 몇십 억 명이 보는 영상이기도 한 올림픽 개막식은 거대한 실험실이자 놀이터였다. “미디어 기술과 영상을 활용한 공연을 조금씩 실험하던 차에 원 없이 기술을 활용할 수 있는 장이 열린 거죠. 공연 이상으로 카메라 워크를 연구하면서 엄청 공부가 됐어요. 리허설 때도 카메라 중계 프로듀서와 회의를 가장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올림픽이 총체극의 꿈을 이뤄줌과 동시에 잠자던 영화감독의 꿈까지 깨워준 셈이다. 올해 초 개봉한 엑소 찬열 주연의 영화 ‘더 박스’가 그 결과물이다. “영화 작업에서 가장 즐거운 건 로케이션이었어요. 방랑 기질 때문에 산이나 계곡에서 장소특정형 연극을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연극은 연습실에서 상상으로 로케이션을 하잖아요. 로드 무비라 대자연에서의 작업을 만끽할 수 있었죠. 기회가 되면 계속 하고 싶어요. 이미 유명 웹툰 작가 원작의 차기작도 계약했죠.”
스마트폰으로 15초짜리 영상을 즐기는 시대, 3시간 15분짜리 연극을 한 달 전에 예매해 공연장까지 찾아가는 건 어떤 사람들일까. ‘연극인들의 꿈의 무대’였던 역삼동 LG아트센터가 사라지는 것처럼, 연극은 점점 외곽으로 밀려날수 밖에 없는걸까. “연극의 시장 수요가 줄어드는 건 이미 세계적으로 오래된 일이죠. 쉬면서 연극이 뭘까, 앞으로 연극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팬데믹 이후 오히려 희망을 봤어요. 거리 두기가 완화되면서 영화보다 공연 관객이 늘고 있거든요. 그만큼 충성 관객이 많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걸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야겠죠."
‘연극이 뭘까’ 고민했다지만, 극단 ‘여행자’를 이끌고 25년간 전 세계 페스티벌을 돌아다닌 그에게 연극은 언제나 여행이자 축제다. 사람들이 모여서 부대끼며 삶을 그려내는 거라서다. “페스티벌을 보러 다니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서 사랑하고 대립하고 먹고 마시고 춤추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연극 자체가 축제더군요. 여행지에서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계획하게 되듯 스토리를 여행하는 연극도 여행이다 싶고요. 삶을 여행에 비유하곤 하니까, 삶을 그리는 연극도 여행 떠나듯 보면 좋지 않을까요.” 연극이 삶이고, 삶이 곧 연극이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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