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한 어머니의 영원한 전쟁

- 2021. 6. 25.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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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부서진 한 여성의 삶
자식 건사하며 '억척 어멈'으로
애도받지 못한 무의식 저편에서
평생 내색 못한 채 홀로 견뎌와

“가자! 가자!” 정신이 성하지 않은 어머니는 밤낮 이 말만 되풀이한다. 다른 말은 다 잊었다. 자식들조차 알아보지 못한 지 오래다. 그런 어머니가 주문처럼 연신 “가자! 가자!”를 외친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만이 어머니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의식인 것처럼.

1959년 발표된 이범선의 단편소설 ‘오발탄’은 많은 사람에게 꽤 익숙할 듯하다. 소설로 발표된 이후 교과서에 소개되며 한국문학의 정전으로 받아들여진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유현목 감독의 동명의 영화가 1960년대 한국 영화의 품격을 드높이며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덕도 없지 않을 듯하다. 고향 마을에선 큰 지주로서 제법 풍족하게 살아왔던 그녀가 해방 이후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를 피해 월남한 뒤 게딱지 같은 판잣집들을 다닥다닥 붙여놓은 ‘해방촌’에 적응하지 못하다가 6·25와 함께 “바로 발밑에 빤히 내려다보이는 용산 일대가 폭격으로 지옥처럼 무너져나가던 날” 모든 것을 완전히 놓게 되는 장면은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여전히 뼈아프다. 전쟁이 한 여성의 삶을 어떻게 산산조각 내버렸는지 이보다 잘 보여주는 장면도 드물 듯하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 문학평론가
물론, 모든 어머니가 전쟁 통에 의식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문열의 ‘영웅시대’(1984)나 김원일의 ‘마당 깊은 집’(1988) 등을 통해 휴전 이후 사회주의자 남편의 월북과 죽음을 견디며 자식들을 건사하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극한의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지켜본 바 있다. 이 강인한 모성은 종종 ‘억척 어멈’이라고 불리며 한국문학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생존자’이자 ‘어머니’인 이 여성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칭송하고 영원한 본보기로 삼는 것만이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까.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이 이미 70주년을 넘어선 지금, 우리는 오늘의 우리를 낳은 이 어머니들에게 경의를 표할 뿐만 아니라 이 어머니들의 애도받지 못한 삶의 무의식 저편에 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그럴 때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또 여성으로서, 이 어머니가 겪었던 전쟁의 진면목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이 순간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 2’(1981)가 다시 상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듯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박완서 선생은 동명의 소설을 세 편 발표했다. 그만큼 ‘엄마’와 전쟁,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한 복원과 애도는 작가의 필생의 화두였다. 이 소설 속 어머니는 일찍 남편을 잃고 바느질품을 팔아 자식을 건사하던 중 6·25의 와중에 외아들을 여의고 현재 86세에 이른 노인이다. 일견 무탈해 보이던 그녀의 일상은 눈길에 미끄러져 부러진 다리를 수술하고 난 저녁 그동안 억압해온 ‘어떤 기억’의 역습을 경험하며 전혀 다른 국면을 선사한다. “안 된다. 안 돼. 이노옴. 안 돼. 너도 사람이냐? 이노옴, 이노옴.” 아들의 다리에 총을 쏜 ‘군관 동무’를 향한 그녀의 비명과 호소는 엄마의 ‘전쟁’이 과거의 것으로 완료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온전하게 증명한다. 어쩌면 엄마는 평생 내색하지도 못한 채 홀로 이 ‘전쟁’을 지속해온 것인지도 모른다.

박완서 선생은 이를 다음과 같은 말로 정리한다. “그 며칠 동안의 낭자한 유혈과 하늘에 맺힌 원한을 어찌 잊으랴. 그러나 덮어둘 순 있었다. 나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아 또 사랑하는 걸로. 어머니는 손자를 거두어 기르며 부처님께 귀의하는 걸로.” 그랬다. 선생뿐이랴. 우리 모두 그랬다. 잊을 수 없는 어떤 것도 일상의 시간으로 ‘덮어둘 순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완전히 ‘덮어둘 순 없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이제 이 어머니들을 향해 덮어두려는 노력 대신 덮어두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 모두 말해줄 필요가 있다. 덮어두어선 안 될 것을 더는 덮어두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그녀들의 ‘어떤 기억’을 온전히 애도하는 것, 지금 우리의 ‘전쟁’은 여기에서 출발해야 할 것도 같다.

신수정 명지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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