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교실에서 힘든 시간을 버티는 아이들에게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경향신문]
▶교실 맨 앞줄
김성일 외
학교에 관한 장르 단편집 <교실 맨 앞줄>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데, 그중 맨 앞에 실린 ‘도서실의 귀신’은 한 사람이 청소년기에 도서실에서 귀신을 만나 가장 외로웠던 시기를 잘 흘려보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서실의 귀신’의 주인공은 엄마가 여기저기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전학을 자주 다닌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다섯 번째로 전학 온 학교에서 주인공은 귀신을 만난다. 이 귀신은 도서실에 사는 귀신으로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처음 도서실 귀신을 만난 주인공은 ‘학교 건물이 오래되었다고 듣기는 했는데 귀신이 다 있구나’ 하고 놀라면서도 크게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는다.
도서실 귀신은 주인공이 어떤 책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전에 귀신같이 알아서 과제를 하는 데에 딱 알맞은 책을 책장에서 꺼내 내민다. 흰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탁자 위에 사뿐히 내려앉아서. 그런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다 주인공이 귀신과 있는 것을 본 선생의 반응도 기가 막히다. “어쩐지 여기 아무도 안 온다 했더니만…… 이런 데 귀신이 다 있었네.” 이런 데 쥐가 다 있었네, 하는 정도의 반응이다. 선생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주인공에게 귀신하고 그만 놀고 얼른 집에 가보라는 식으로 말한다.
도서실 귀신을 알게 된 그날, 주인공은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고 다음날에도 방과 후에 도서실에 가서 귀신을 만난다. 귀신은 첫날처럼 책 한 권을 골라 탁자에 놓아두고, 주인공이 그 책을 읽는 동안 춤을 춘다. 그 후로 주인공은 매일, 방과 후 두 시간씩을 도서실에서 보낸다. 도서실 귀신이 추천해준 책들은 <80일간의 세계 일주> <해저 2만리> <백경> <레미제라블> <빨간 머리 앤> 같은 책들이다. 도서실에서 귀신과 책을 읽는 그 시간 덕분에 주인공은 친구 없는 교실에 있는 시간이 견딜 만해진다.
그러나 새로운 학교에 전학 와서 도서실에 처박혀 귀신하고만 노는 아이를 교사와 부모가 방관할 수만은 없다. 주인공의 아빠는 담임 선생님의 연락을 받고 주인공에게 이제 도서실에 가지 말라고 하며 이렇게 말한다. “너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 귀신하고 놀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사람 세상하고 그만큼 멀어지는 거야. 너 앞으로 어떡할 거야? 커서 무당 될 거니?”
결국 마지막으로 도서실에 가서 이제 올 수 없게 됐다며 울먹이는 주인공에게 도서실 귀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이 준비한 마지막 선물을 보여준다. ‘채수현이 지금까지 읽은 것들’이 꽂힌 작은 서가 하나와 ‘채수현이 앞으로 읽을 것들’이라고 적힌 많은 서가들, 그리고 ‘채수현이 앞으로 읽지 못할 것들’ 표지판이 붙은 광대한 책의 숲.
주인공은 ‘앞으로 읽을 것들’이 꽂힌 서가에서 중얼거린다. “읽을 것들이 이렇게 많구나.” 이 중얼거림의 안쪽에는 아마도 ‘앞으로 더 살아보아도 좋겠구나, 이렇게 읽을 것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읽지 못할 것들’ 표지판이 붙은 광대한 책의 숲에서 주인공이 느낀 ‘반쯤 슬프고 반쯤 경이로운, 이상한 기분’은 우리가 살아가며 다 알 수 없는 세상의 신비로움을 최초로 감지했을 때의 기분일 것이고 말이다.
세상에 ‘앞으로 읽을 것들’이 많이 남아 있고, 평생을 살아도 ‘읽지 못할 것들’이 아주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다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을 다 알 것 같은 순간들이 많아진다. 매일 비슷하게 반복되는 것 같은 뉴스들, 똑같은 일상, 비슷비슷한 만남과 비슷비슷한 사람들. 세상이 뻔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그러나 좋은 이야기를 만나면 세상에 내가 아직 읽지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끝내 만나지 못할 이야기들이 또한 너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만큼 보지 못한 풍경들과 만나지 못한 사람들도 세상에 많이 남아 있다. 한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몇 권의 책을, 몇 개의 풍경을, 몇 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나에게도 학교 안에서 책을 읽으며 교실에 있는 시간을 버티던 나날들이 있었다. 책이 없었다면 그 시간을 무사히 통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도서실의 귀신’을 읽으며 그 나날들이 떠올랐고 그 시간을 통과하지 못한 아이들이 뒤이어 떠올라 가슴이 먹먹해졌다. 진심으로 사과를 전하고 싶다. 세상에 아직 볼 것이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종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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