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이양

한겨레 2021. 6. 25.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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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인지 나를 배려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식당을 가더라도 대체로 비슷한 연배가 올 만한 곳을 찾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이 점이 더 놀라웠던 것은, 이 연극이 나이 든 사람의 기억을 다룬 것이고, 내가 알기에 그런 이야기야말로 젊은이의 기피 대상 일순위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공간이라면 몰라도 나이 든 사람의 기억 공간으로 젊은이가 들어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마음을 여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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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틱]

[크리틱] 정영목 ㅣ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젊은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인지 나를 배려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식당을 가더라도 대체로 비슷한 연배가 올 만한 곳을 찾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도 산이나 냉면집을 찾는 젊은 사람들이 느는 것이 느껴지면 침범당했다는 생각보다는 반가움이 앞선다. 연극을 공연하는 작은 지하 극장을 채운 젊은 사람들 속에 앉아 보는 경험도 각별한데, 지난해에는 체호프의 <벚꽃 동산>(전훈 연출)을 보러 갔을 때 만원을 이룬 젊은 관객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학업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지만, 긴 공연 내내 유지된 몰입의 분위기는 나의 여러 선입관을 부술 만했다.

최근에 본 <서교동에서 죽다>(고영범 작, 이성열 연출)도 젊은 관객으로 만원이었고, 운 사람이 눈에 띌 만큼 깊이 몰입하는 분위기였다. 이 점이 더 놀라웠던 것은, 이 연극이 나이 든 사람의 기억을 다룬 것이고, 내가 알기에 그런 이야기야말로 젊은이의 기피 대상 일순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연극은 서두에 아예 내레이터가 관객 앞에 서서 이것이 어떤 “아재”의 사소한 이야기라고 밝힌다.

물리적 공간이라면 몰라도 나이 든 사람의 기억 공간으로 젊은이가 들어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마음을 여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물론 이 연극에는 젊은 관객이 동일시할 수 있는 인물인 젊은 작가 지망생 도연(강해진)이 등장한다. 미국에 사는 자칭 망한 작가 진영(박완규)이 암에 걸린 누나(서진)의 병문안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누나의 부탁으로 조카 도연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연극은 진영과 도연이 대화를 나누며 진영의 기억을 찾아오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따라서 관객은 자연스럽게 도연이 진영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과정을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도연은 젊은 관객의 편의를 위한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도연은 처음에는 단순한 청자, 기억 복원의 보조자처럼 보이지만 서서히 연극의 중심, 즉 진영의 기억의 중심으로 진입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먼저 이 연극은 나고 죽는 것에 따른 젊음과 늙음의 질서를 흔들어 놓는다. 연극의 제목 “서교동에서 죽다”의 의미를 알겠다 싶을 때쯤이면 다시 누가 죽는 것인지, 어디에서 죽는 것인지, 나아가 죽는 게 뭔지도 모호해지고 만다. 또 동일성에 기초한 정체성도 벗겨버린다. 영민한 도연은 글에서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를 분리하면서 그 둘이 어째서 같은 것인지 묻는다. 결국 진영의 기억 복원도 나의 과거라는 경계 내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여러 세계에 속한 여러 진영을 찾아가는 과정이 된다. 따라서 아래위, 과거와 현재라는 틀은 사라지고 스무 살의 도연은 같은 평면에서 열두 살의 진영을 만날 수 있고 열일곱 때의 어머니가 될 수 있다. 딸보다 나중에 죽을 가능성이 큰, 또 삶 자체가 정체성 혼란인 치매 할머니(린다전)는 이 연극의 상징이고, 어쩌면 우리 삶의 상징일 것이다.

서열화 범주화되지 않은 이런 상태에서 젊은 도연은 아재의 기억에 진입한다. 그 기억이 한 사람의 기억, 그 한 사람의 동일성을 유지해주는 역할에서 풀려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연극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등장인물”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마지막 장에서 진영은 자신의 기억의 주인이자 기록자라는 오만한 역할에서 겸손하게 물러나며 기록의 권력은 도연에게 평화적으로 이양된다. 그 결과 지금까지 우리가 본 이야기의 서술자가 진영인지 도연인지 헛갈리는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런 구별이 의미 없어지는 상태야말로 기억이 진정으로 공유된 상태가 아닐까. 아마 진영은 관객을 등지고 누워 죽어가던 아버지와 그런 상태에 이르지 못한 것이 평생 아쉬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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