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전력의 연결망 '그리드'가 위험하다
다람쥐 한 마리에 블랙아웃되고 잦아진 이상기후에 속수무책
변동성 큰 재생에너지에 맞춰 새로운 설계·기술 요구되는 시대
전기 에너지의 역사와 미래 조망
[경향신문]
▶그리드
그레천 바크 지음·김선교, 전현우, 최현우 옮김
동아시아 | 532쪽 | 2만2000원
지방 도로를 운전하다 우연히 만난 저녁 노을을 카메라에 담았다고 해보자. 사진 속 붉은 하늘은 송전선으로 쪼개져 있고, 프레임 한가운데 송전탑이 놓여 있다. 하지만 사진을 본 사람은 하늘의 빛깔에만 감탄할 것이다. ‘그리드(grid·연결망)’는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리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기계이자 우리 생활을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존재다. 그리드는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설치된 선로 및 관련 시스템 전반을 의미한다.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로부터 시멘트 벽 속에 숨겨진 변전소, 전봇대 꼭대기에 코코넛처럼 매달린 변압기, 가정까지 이어지는 전선, 심지어 충전기와 연결된 스마트폰까지도 그리드의 일부분이라고 한다. 에너지 혁명이 이야기되는 기후위기 시대, 가장 중요하지만 거의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전기 인프라다. <그리드>에선 그리드가 거쳐온 과거, 여러 도전을 마주한 현재를 살펴보고, 이 도전에 맞서 나아가야 할 미래를 전망한다.
기후위기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인 만큼, 재생에너지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미국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를 최소 50% 감축하기로 약속했고, 한국도 목표 상향 압박을 받고 있다. 정치적 당위를 넘어, 발전 단가가 빠르게 떨어지면서 경제적으로도 더 합리적 선택이 되고 있다. 도시 곳곳에 설치된 태양광 패널, 해안가와 산등성이의 풍력발전기는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녹색’에너지에 더 많이 투자할수록, 그리드는 더욱 취약해진다.”
20세기의 그리드는 플루토늄, 천연가스, 석유, 석탄 등의 자원을 태워 만들어낸 꺼지지 않는 불꽃에 맞춰 건설됐다. 전기를 만들고 전송하는 사업은 독점기업들이 운영하는 강력한 중앙집중식 구조를 통해 이뤄졌다. ‘안정적’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재생에너지들은 길들일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태양광 패널에 그늘이 드리우면 전기 생산량이 곤두박질치고, 풍속의 변화는 매 순간 전류를 오르내리게 만들어 전압과 주파수를 요동치게 한다. 그리드는 변화를 예측할 수 있는 전류를 분배하는 기계다. 그렇지 못한 전류가 그리드에 더 많이 들어올수록 운영이 복잡해지고,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거기다 이상 기상현상이 잦아지고, 낡고 거대한 인프라를 당장 바꾸기도 어렵다면? 그 복합적 결과가 올 초 미국 텍사스 정전사태와 같은 대규모 블랙아웃이다. 그리드는 불안정한 데다 변덕스럽기까지 한 전기 공급에 적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드의 위기는 곧 현대 산업과 사회의 위기이다.
책에선 오늘날의 그리드를 살펴보기 위해 19세기 패러데이와 에디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드로 짜여진 전기사업의 틀은 새뮤얼 인설(1859~1938)이라는 인물의 업적이다. 요약하면, 낮은 가격으로 고객을 끌어들이고, 규모의 경제를 강조하고, 신기술을 이용한 진보로 전기 사용자와 이용량을 모두 늘리는 것이다. 기업들이 주거 및 상업 고객보다 더 낮은 가격을 적용받는 것도 그가 만든 논리라고 한다.
하지만 규모와 효율의 관계는 이미 1970년대부터 금 가기 시작했다. 특히 인프라 노후화가 심각한 미국에선 2014년 악천후로 인한 중대 정전이 77건, 연료 부족으로 인한 정전이 17건 발생했다고 한다. 뜻밖이지만, 동식물이 유발하는 정전도 엄청나다. 2003년 당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 블랙아웃이 동부에서 발생해 60억달러의 피해를 입혔는데 주요 원인이 전기사업자 퍼스트에너지 사업소에 있던 나무 세 그루와 때마침 일어난 컴퓨터 버그였다고 한다. 텍사스주 오스틴에선 다람쥐가 1년 동안 300건에 달하는 정전을 초래했고, 캘리포니아주에선 야생동물에 의한 정전사고가 연간 최대 3억1700만달러의 피해를 입혔다는 연구가 있다.
허리케인 샌디와 같은 폭풍은 말 그대로 재앙이다. 전기가 끊기면 복구도 난망하다. 당시의 경험으로부터 회복력 있는 그리드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더 작고, 더 지역적이며, 더 독립적이고, 더 회복성이 있는” 마이크로 그리드로의 이행이다. 마이크로 그리드는 분산된 에너지원의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는데, 갑작스럽게 연료 공급이 차단되거나 악천후가 발생해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이미 구글은 본사와 데이터센터를 마이크로 그리드로 운용하고 있으며, 애플 역시 기존 그리드와 단절되어도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자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재생에너지의 높은 변동성 때문에 에너지 저장기술에 대한 수요와 연구도 급증하고 있다. 전기자동차가 배터리로서 그리드를 구성할 수 있다는 서술에 이르면 에너지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도 커져 간다. “그리드는 미래에 대한 약속을 담은 채 오늘도 빛과 에너지를 발하고 있다.”
책에서는 기술적 어려움부터 기존 사업자들의 저항까지 수많은 우려와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그 위기가 준비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전기의 역사와 미래 기술을 조망하는 심도 있는 책이지만, 아무래도 미국 이야기다보니 동떨어진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한국의 현재와 전망이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옮긴이 해제에 전문가들의 분석을 담았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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