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작가의 다정한 '지구 여행기'[플랫]
[경향신문]
뉴욕 자연사박물관 해양생물관에는 거대한 흰수염고래가 관람객을 맞는다. 지구에서 가장 큰, 실물 크기의 모형 고래로 관람객들은 바닥에 누워 천장에 매달린 고래를 바라보는데, 그러면 마치 고래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소설가 정세랑도 이 고래 아래, 시원한 박물관의 돌바닥에 누워 어떤 ‘경이의 순간’을 떠올렸다고 한다.
“지구는 45억년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은 결국 항성과 행성의 수명이 다하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을 텐데, 우리는 짧은 수명으로 온갖 경이를 목격하다가 가는구나 싶었다. 경이를 경이로 인식할 수만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질 것이다. 덧없이 사라진다 해도 완벽하게 근사한 순간들은 분명히 있다.”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특별해지는’ 마법 같은 일은 여행지에서 더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일상의 공간을 떠났을 때 오는 긴장도 분명 있지만, 낯선 공간에서 여행자의 감각도 활짝 열리게 된다.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수 없어>는 그렇게 만난 ‘근사한 순간들’을 담은 정세랑의 첫 에세이다.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그의 소설만큼이나 다정한 시선이 담뿍 담겨 있는 책이다.
작가는 원래 여행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몸이 아팠던 경험으로 낯선 상황 속에 놓이게 되는 여행을 ‘건강한 사람들의 전유물’로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랬던 그가 친구가 보고 싶어 뉴욕까지 날아가고, 영화관 이벤트에 당첨돼 생긴 비행기표로 런던에도, 남자친구의 유학길을 따라 한 달간 독일에도 간다. 그렇게 어쩌다가 시작한 여행의 순간들이 9년간 에세이로 쌓였고, 여행이 멈춘 시기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다.
작가는 여행지에서 만난 풍경들, 그 안의 사람들을 찬찬히 또 사려깊게 바라본다.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비에 젖은 토끼 인형을 보고 ‘사람들이 길에 두고 가는 아름다운 물건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오랜 취미가 생기기도 하고, 런던의 ‘픽션 속 공간들’을 걸으며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의 주인공들을 떠올리거나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에 아릿해지기도 한다. 바리케이드도 혐오세력도 없는 뮌헨의 퀴어 퍼레이드에선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들이 차별과 모멸을 겪으며 깎여나가지 않는 세계”를 기도한다.
코로나19로 멈췄던 여행이 다시 시작될 때, 세상 곳곳에 진득하게 남아 있는 혐오로 “내가 평화롭게 기억하는 공간들이 완전히 다른 표정을 하고” 있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의 여러 소설이 그랬듯, 동시대 여성들을 향한 온기 어린 시선도 여행기 곳곳에서 묻어난다. 작가는 “여자들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세계 곳곳 여자들의 삶에 대해. 여자 이름으로 된 제목의 소설들을 많이 쓴 것은 그래서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는 “외부로부터, 사회로부터 주입되지 않은 종류의 욕망”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한다며, 자신의 ‘최대 가능성’을 욕망하게 됐다고 말한다.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위즈덤하우스|400쪽|1만6800원
“이 불완전하고 가혹한 세계에서,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성장해보고 싶다고 스스로의 욕망에 이름을 붙였다. 아시아인은 어릴 때부터 겸손과 중용을 교육받으며 자라기 때문에 한 사람의 최대 가능성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시아 여성은 더더욱…….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일본 아라시야마에서 우연히 만난 한 아주머니의 안내로 찾게 된 소녀들의 계단길에 얽힌 일화에서도 그런 응원과 연대의 마음이 읽힌다. 매년 11월13일이면 13세를 맞은 소녀들이 이 계단길을 걸어오른다고 한다.
“누가 부르건 뒤돌아보지 말고 걸어야 하는 계단길이었다. 뒤돌아보지 않으면 이후 내내 평탄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일종의 응원해주는 의식 같은 것인 모양이었다. (…) 열세 살이면 돌아보지 않을 수 있는 나이, 앞만 보고 걸어가는 느낌을 기억해둔다면 존재하지 않는 괴물도 존재하는 괴물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일부러 통과하기 쉬운 의례를 만들고, 삶과 기억에 분기를 두어 다음 세대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겠구나, 짐작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작가가 그 길의 안내자에게 건네는 인사는 읽는 이에게도 뭉클함을 남긴다. “함께 걸었던 길을 자주 생각합니다, 저는 뒤에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잘 올라가고 있습니다.”
정세랑은 이 책에서 “여행 그 자체보다 여행하며 안쪽에 축적된 것들”을 찬찬히 꺼내보인다. 다섯 개 도시를 여행하며 마주한 “이야기보다 더 이야기 같았던 순간들”과 그때의 따스한 마음이 문장문장마다 담겨 있다.
작가는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이 쉬워진 세상이지만, 좋아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 분명 더 행복하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여행도 삶도 늘 좋을 수만은 없고 세상은 자주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기도 하지만, 정세랑은 “지금이 그리 좋지 않은 시대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어디선가 다정한 대화들이 계속되고 있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버릴 수가 없다”고 말한다. 호기심 많고 다정한 지구 여행자와 동행하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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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수 기자 sms@khan.kr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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