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팬데믹 탓에.. 사랑이, 자유가, 헌법이 '폐지'되었다

나윤석 기자 2021. 6. 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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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 얼굴 없는 인간 | 조르조 아감벤 지음 |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코로나 시대 일상의 변화 대한

伊 철학자 아감벤의 도발·반기

방역 명분으로 사회적 삶 파괴

인간, 생물학적 존재로 축소돼

자유 보장하는 헌법 효력 정지

전체주의적 독재 권력 창출도

팬데믹 후도 일상 회복 힘들듯

예외 상태가 ‘노멀’이 될 우려

“얼굴 없이 ‘벌거벗고 침묵하는 삶’과 ‘종교가 돼버린 보건’을 거부한다.”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류가 공포에 떨던 지난해 11월 한 출판사 웹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스크’와 ‘거리두기’로 요약되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시대가 강요하는 일상의 변화에 반기를 든 것이다.

아감벤은 “인간이 자신을 드러내고 의사소통을 나누는 ‘얼굴’은 가장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장소”라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기로 결정한 국가는 스스로 ‘정치’를 없애버린 셈”이라고 주장했다. 세계 누적 사망자가 150만 명에 육박하던 터라 그에겐 “마스크 벗기를 주장하는 엉뚱한 철학자”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얼굴 없는 인간’은 당시 글을 포함해 아감벤이 지난해 2월부터 올해 1월까지 쓴 23편의 글을 엮은 책이다. 그는 과연 전염병으로 생사가 엇갈리는 고통에 무관심한 ‘한가한 이상주의자’인 것일까.

인류가 직면한 ‘거대한 전환’의 한복판에서 길어 올린 사유들은 단순히 “마스크를 벗어 던지자”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팬데믹 이후’를 모색 중인 우리를 향해 절박한 목소리로 새로운 윤리적·정치적 화두를 던진다. 국가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생명의 보호’가 방역 조치로 인해 파괴된다면, 이 모든 비상조치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리적 생명의 수호가 ‘사회적 삶’을 파괴하고 ‘인류의 집’을 불태운다면, 마땅히 이를 경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얼굴 없는 인간’의 바탕에 깔린 핵심 키워드는 ‘벌거벗은 생명’과 ‘예외 상태’다. 이 개념은 아감벤이 자신의 이름을 세계에 각인시킨 ‘호모 사케르’(2008년)에서 처음 소개한 것이다. 아감벤은 ‘아우슈비츠 희생자’와 ‘고국을 상실한 난민’을 근대 사회의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이라고 지적했다. 법의 보호망 바깥에 있으면서도 자유로울 수 없는 ‘예외 상태’에 놓인 존재라는 것이다. 아감벤이 보기에 팬데믹 시대의 “전염을 피하려고 평범한 일상, 사회관계와 직장, 우정과 사랑, 혹은 정치적·종교적 신념까지 기꺼이 희생한” 시민들은 누구나 ‘벌거벗은 삶’을 살고 있다.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의 효력이 정지되고, 정부의 행정권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황 역시 ‘예외 상태’와 다름없다. 저자는 이동과 각종 모임·집회 등 정치적 활동을 제한하는 조치는 “명백한 위헌”이라며 이렇게 묻는다. “1933년 독일 신임 총리였던 아돌프 히틀러가 바이마르 헌법을 폐지하지 않고 선언한 예외 상태와 무엇이 다른가.”

책은 감염병 사태 속 정부가 수립한 통치 체계를 ‘바이오 보안’이라고 규정한다. 예외 상태의 권력과 디지털 기술 기반의 감시 시스템이 결합한 ‘바이오 보안’은 사회적 관계를 ‘접속’의 형태로 바꾸고, 접속하지 않은 자를 모든 관계에서 배제한다. ‘접촉’은 사라지고 ‘접속’만 남은 탓에, ‘의학’이 종교와 같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변한 탓에 인간은 “생존 이외의 가치를 상실한, 순수하게 생물학적인 존재로 축소”됐고, 시민에겐 “보건 안전에 대한 권리가 아닌 법적 의무”만 남았다. 저자는 “두려움은 사고를 마비시킨다”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해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민주주의를 몰아내고 ‘전체주의적 공산주의’ 형태를 띠는 독재 권력을 만들었다고 꼬집는다.

책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할 책무를 방기한 ‘성직자’와 ‘법학자’를 향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운다. 종교 모임 금지를 순순히 수용하며 ‘과학의 시녀’로 전락한 교회는 13세기 프란체스코 성인이 나병 환자를 품어 안은 역사를, 이웃을 포기하는 것은 믿음을 버리는 행위라는 순교자들의 가르침을 잊었다. 또 법학자들은 행정권이 입법권을 대체하는 ‘삼권 분립’ 훼손에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저자는 “(생명이라는) 도덕적 명분을 위해선 거대한 희생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반론에 대해 “선(善)을 위해 선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이며 ‘모순’”이라고 일축한다.

그렇다면 팬데믹이 자취를 감춘 이후엔 ‘예외 상태’를 벗어나 ‘정상 규범’을 회복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가기는 힘들 것”이라고 비관한다. 각국 정부가 “긴급 사태 이후에도 (수월한 통치를 위한) ‘기술 보건적’ 독재 실험을 지속”한다면 예외 상태가 ‘노멀’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근심은 책에 실린 ‘사랑이 폐지되었다’라는 자작시에 응축돼 있다. ‘사랑이 폐지되었다,/ 보건의 명분으로. /(…)/ 자유가 폐지되었다, 의학의 명분으로’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는 이렇게 끝맺는다. ‘헌법이 폐지되었다, / 긴급 상황의 명분으로. / 그러나 긴급 상황은 폐지되지 않을 것이다.’ 200쪽, 1만5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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