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술자리에도 제법 어울리는, 소시지계의 이단아 '천하장사'

한겨레 2021. 6. 25.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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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박찬일의 안주가 뭐라고]

진주햄 누리집 갈무리.

삼복 더위에 천일염 만드는 서해안에 간 적이 있다. 염부(제염노동자)를 취재하는데, 몇 마디 대답하고는 꼭 거대한 필드 한쪽에 있는 가설 소금막에 들어갔다. 그의 말로는 “몸에 약을 쳐야 한다”는 거였다. 알고 보니 소금에 박아둔 소주 됫병을 꺼내서 한잔을 쭉 들이켜는 일이었다. 안주? 김치 보시기가 옆에 있었지만 소금 몇 알을 툭 던져서 아작아작 씹는 거로 끝이었다. 전설의 술꾼은 소금으로 안주한다는 얘기가 틀리지 않았다. 사실, 그 양반이 진짜 술꾼인지 나는 모른다. 고된 노동을 술로 다스리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늘 하나 없는 소금밭에서 마시는 미지근한 소주가 무슨 맛이 있겠는가.

소금밭에 사진 찍으러 가시는 분들이 꽤 많다. 하늘은 파랗고 소금은 하얘서 색 대비가 기막히지, 특히나 바닷물이 아직 덜 증발해서 소금꽃 피기 전에는 필드가 더 장관이다. 염부의 작업하는 모습이 데칼코마니마냥 이중으로 뷰파인더에 들어온다. 워낙 필드가 넓어서 우주에서 보면, 마치 지구의 거울 같을 거다. 그러니 사진 스폿으로 엄청나다. 구릿빛으로 단련된 염부의 써레질은 그것 자체가 그림이다. 하나, 힘들게 일하는 양반들 생각하면 카메라는 조심해서 댈 일이다. 허락받고 찍으시길.

위스키 전문가 한 분이 무슨 무슨 술에는 초콜릿이 어울린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위스키는 좋아하지 않아서 소주를 깠다. 초콜릿은 ‘가나’. 채시라가 아직도 선전하나. ‘경고: 절대 소주에는 초콜릿을 곁들이지 마세요. 물론 소금도 웬만하면 참아주세요.’

10년 전 일이다. 소주고 막걸리고 꼭 천하장사만 좋아하는 친구가 있었다. 얼마나 짠돌이냐면, 내가 열 번 사면 한 번 술을 사는데, “2차는 내가 쏠게”하고 편의점 야외탁자로 간다. (요즘은 편의점 야외탁자서 취식하는 것 안될 겁니다!)

“야, 실컷 먹어, 응 먹어. 걱정 말고.”

짜샤, 편의점에서 제일 비싼 게 뭔가 봤더니 피에르 가르뎅 자동 3단 우산이더라. 별수 없이 주섬주섬 냉동식품을 찾는데, 녀석이 천하장사를 집었다. 이것이 바로 호부호형을 못한다는 그 소시지였다. 소시지라고 부르되, 어육이 많이 들어가서 고기로 만든 소시지 계에서는 혈통 관계를 부인한다는 그 전설의 소시지. 은근히 이게 까먹는 맛이 있어서 안주로 괜찮다. 빨간 줄을 삭 벗겨서 쭉 내리면 홀랑 까지는데, 더러 잘 안되는 게 있다. 그러면 물어뜯어 까다가 이 나가는 수가 있다.

소시지 괴담 하나. 옛날에 소시지 뒷면에 잘 보면 ‘토끼고기’가 들어간 놈이 꽤 있었다. 와! 그 구하기 힘든 토끼. 이랬는데 털가죽 얻으려고 사육한 토끼고기를 때려 넣었다는 전설. 불법은 아니지만 왠지 찜찜하지 않았던가. 요새는 털가죽 사육을 안 하는지 토끼고기 들어간 건 보이지 않는다. 비슷한 예가 있다. 헝가리에는 푸아그라가 아주 싸다. 왜 그런가 봤다. 헝가리는 세계적인 오리털, 거위 털 생산국이다. 그 털이 어디서 나오나. 길러야 한다. 털을 쓰면 고기가 나온다. 간도 생긴다. 누군가 무릎을 쳤을 거다. ‘푸아그라를 만들어 팔아야 해.’ 한데 맛이 없다. 푸아그라는 그놈의 간을 위해 기름진 사료를 엄청 먹인다. 털을 얻자고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맛이 별로다. 알뜰하게 팔려는 게 장사꾼이고 틀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알고는 먹자는 얘기다. 어쨌든 헝가리 미안.

천하장사 좋아하는 그 친구(씨름은 전혀 못 한다)는 머리도 잘 돌아간다. 왜 아니겠나. 2차를 편의점에서 사는 녀석인데. 천하장사를 사면서 복숭아 통조림을 하나 집어 들고는 냉동칸에 넣는다. 알바 몰래 하는 짓이다. 천하장사를 맛있게 먹고, 술도 몇 캔 쓰러져 있을 무렵, 쓱 일어나서 편의점에 들어간다. 통조림을 꺼내서 계산한다. 알바가 모르실 리 있나. 바코드 찍으려고 만져보면 차가운데. 녀석의 ‘진상짓’이 여기서 끝이냐. 노노. 알바에게 숟가락까지 얻어온다. 안되면 컵라면용 젓가락이라도. 하여튼 알바에게도 미안.

맛있다. 제법 차가운 통조림. 미지근해지면 일회용 컵에 담긴 얼음을 사서 넣고는 휘휘 젓는다. 어어, 이거 은근히 마무리 해장으로 괜찮아. 당뇨 있는 다른 친구 빼고 우리가 다 먹었다.

“호프집 가서 화채로 사 먹으면 얼마냐. 여기선 2500원이면 땡이야.”

잘났다 인마.

천하장사로 끝날 녀석이 아니다. 일회용 컵 얼음을 하나씩 돌린다. 차가운 소주 한 병을 집어 들고는 콸콸 따른다. 여기에 ‘자양강장제’ 드링크를 섞는다. 옛날엔 원비디를 넣으면 인삼주, 맥소롱을 넣은 ‘진짜 쏘맥’도 말아먹었는데. 도라지 위스키 시절의 이야기다. 편의점에는 없는 게 없다. 왕년의 캡틴큐, 나폴레옹은 없지만 저렴한 위스키도 판다. + 일회용 얼음 컵 + 드링크나 스파클링 생수, 또는 토닉워터(편의점에 다 있다)를 섞어 마시면 끝내준다. 천하장사도 뭐 꽤 어울린다고. (천하장사에는 고춧가루 뿌린 마요네즈가 딱인데.)

박찬일(요리사 겸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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