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병 2만9000여명 다부동 전투 등 참전.. 2573명 전사 [디펜스 포커스]

박수찬 2021. 6. 25.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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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왜 기억해야 하나
소녀병 467명도 입대, 전선 누벼
소년병 기록 별로 없어 예우 차질
휴전협상 중 벌어진 고지전 치열
38선보다 북쪽에 형성된 휴전선
수많은 병사들이 피 뿌린 결과물
국군 전작권 6·25 당시 美에 넘겨
71년이 지난 지금도 못 돌려받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휴일의 단꿈에 젖어 있던 38선 일대에서 갑작스레 포성이 들려왔다. 서해 옹진반도에서 동해안에 이르는 38선 전 지역에서 일제히 울린 포성은 반세기가 넘는 기간 남북 충돌과 갈등, 대립의 근본적 원인이었던 6·25전쟁의 신호탄이었다.

25일은 6·25전쟁이 일어난 지 71년이 되는 날이다. 1953년 7월 휴전협정 체결 시까지 전투병력 160만명이 숨지고, 오늘날까지도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지만, 6·25에 대한 기억은 서서히 잊히는 모양새다. 6·25전쟁 71주년을 맞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6·25전쟁을 ‘소년병’ ‘고지전’ ‘전시작전통제권’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했다.

◆2만9000여명의 소년병이 나라를 위해 싸웠다

2만9603명. 국방부가 추산하는 6·25전쟁 참전 소년병 규모다. 소년병은 18세 미만의 어린 나이에 참전한 이들이다. 병역의무는 없으나 군번을 받아 전쟁에 동원된 군인들로 3년 이상 복무했다.

북한군의 공세로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했던 전쟁 초기에 많은 소년병이 동원됐다. 일부 소년병은 “국가적 위기를 지켜만 볼 수는 없다”며 자원입대하기도 했지만,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입대하기도 했다. 심지어 ‘키가 크다’는 이유로 징집된 사례도 있다. 소년병뿐만 아니라 소녀병 467명도 입대해 전선을 누볐다.
이들은 다부동 전투를 비롯해 인천상륙작전, 1·4후퇴,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거제 포로수용소 경비작전 등 6·25전쟁의 주요 전투와 작전에 참가했다. 이 과정에서 2573명이 전사했다.

소년병 활동에 대한 공식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문서 작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그나마 작성된 문서도 후퇴와 진격을 거듭하면서 상당수가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보니 입대 또는 군번 수여 시기 등 기초적인 병적 기록조차 찾아보기 힘든 사례도 있다. 입대 과정을 적은 문서도, 전투에서 어떤 공적을 세웠는지 알 수 있는 기록도 찾기가 쉽지 않다. 소년병의 활동이 잊힐 우려가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소년병의 공적을 기리고 예우하기 위한 입법 움직임이 15대 국회 때부터 추진됐으나 법안 통과로 이어진 적은 없다. 정부 차원에서 소년병의 행적을 적극적으로 조사하고 예우하는 한편 추모사업을 전개해 이들의 애국심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6·25전쟁의 진짜 전투, 고지전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6·25전쟁 서적이나 기록은 전쟁 초반의 1년은 자세히 설명하지만, 나머지 2년은 ‘지루한 휴전협상 과정에서 전투가 있었다’는 식으로 간단히 설명한다.

하지만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휴전협상 기간 벌어진 고지전이었다. 경기 파주 임진강부터 강원 고성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는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시까지 고지를 차지하려는 전투가 계속됐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혈투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병사들은 전투를 멈출 수 없었다. 고지에 적 포탄이 낙하하면 장병들은 참호나 동굴형 진지로 대피했다가 반격을 했다. 전투지역은 좁았지만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수천~수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늘날 38선보다 북쪽에 형성되어 있는 휴전선은 수많은 병사들이 피를 뿌린 고지전의 결과물이다. 국방부는 화살머리고지와 백마고지 일대에서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작업을 진행 중이다.
백마고지, 화살머리고지, 수도고지, 도솔산, 단장의 능선 등 6·25전쟁 기간 벌어진 고지전 중 화천 425고지 전투는 정전협정을 앞두고 벌어진 전투로, 국군의 6·25전쟁 마지막 승전으로 꼽힌다.

강원 화천군 비무장지대(DMZ)에 있는 425고지는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 전력 공급원인 화천댐으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앞두고 중공군은 15개 사단을 투입하는 7·13 총공세에 돌입했다.

이때 국군 제7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장 김한준 대위는 중공군 1개 대대가 7월 19일 공격을 감행하자 중대본부 요원 6~7명으로 결사대를 조직해 반격했다. 1중대는 196명 중 160여명을 잃었지만 425고지를 지켰다. 덕분에 국군은 휴전선을 38선으로부터 35㎞나 북상시킬 수 있었다. 이 전투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가 ‘고지전’(2011)이다.

◆6·25 당시 미국에 넘어갔던 작전통제권

한국군의 전작전 전환도 6·25전쟁이 남긴 유산이다. 6·25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은 작전지휘의 일원화를 위해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국군의 작전지휘권(작전통제권)을 이양했다.

이는 1953년 10월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1994년 12월 평시작전통제권을 한국 합참의장이 행사하게 됐지만, 전작권 전환은 시기가 정해지지 않았다. 이후 한미는 2014년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 원칙에 합의했다. 구체적인 조건은 △연합방위 주도를 위해 필요한 한국군의 핵심 군사능력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대한 한국군의 초기 필수 대응능력 △전작권 전환에 부합하는 한반도 및 역내 안보환경이다.

한·미는 2019년 후반기 연합지휘소연습에서 미래연합사령부 기본운용능력(IOC)을 검증, 전작권 전환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 지난해 하반기 연습에서는 완전운용능력(FOC) 검증을 일부 진행했으나 코로나19로 미군 증원 병력이 오지 못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지난 3월 연습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이 “전작권 전환조건을 완전히 충족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입장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오는 8월 연습에서도 FOC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면 전작권 전환 시기는 더욱 늦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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