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스러운 목적지, 주택' 짓는 건축가 정수진

효효 2021. 6. 25.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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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효아키텍트-89] 최근 서울 성동구 성수동 번화가에 지어진 5층 규모 '윤슬빌딩'(대지면적 231㎡, 연면적 583.36㎡)은 집이다. 지하 1층~3층은 상가이고, 4~5층, 다락과 옥상이 세 식구의 주거 공간이다. 4층에는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거실, 식사 공간, 주방이 디귿(ㄷ)자 형태로 중정을 감싸 안는다.

남쪽을 막고 동쪽으로 활짝 열린 중정은 사생활을 보호하면서 채광과 환기, 풍경까지 책임진다. 좁은 폭 도로를 사이에 둔 건너편 건물과 마주하는 것을 피해 남쪽을 막았고, 옆 건물의 시선이 닿지 않는 위치에서 동쪽을 열었다. 단층 주택에만 적용 가능했던 중정을 올려 서울의 먼 풍경뿐 아니라 근경과 집 내부에서 가족끼리 서로의 모습을 통해 소통한다.

윤슬빌딩 / 사진제공 = 건축사사무소 에스아이

정수진은 1980년대 후반 대구에서 건축학과를 다녔다. 근대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도 잘 모르고 서울 소재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학부와 대학원을 통해 이론만 습득했다. 대학원에서는 캠퍼스 내 미대 영향을 받아 미술부터 배웠다. 뛰어난 스펙을 가진 교수는 교육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았다. 설계는 유학을 가서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그녀가 프랑스로 향한 건 유럽 여행에서의 끌림 때문이었다. 르코르뷔지에의 라 투레트 수도원, 문을 열고 들어선 복도 끝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빛이 밀려 들어왔다.

정수진은 라 투레트 수도원에서 태고의 빛과 암흑을 담은 듯한 경건한 건축에 충격을 받는다. 유대계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1878~1965)는 '모든 여행에는 자신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이쯤에서 필자가 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말해야겠다. 2013년 초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수도원에서 8박9일간에 걸친 피정 경험 때문이다. 성경 묵상과 규칙적인 기도 생활에서 오는 영성 외에 성당과 경당 등 수도원 공간에서 오는 영성도 컸다. 영적 여행의 모티프가 된 그곳에서 이미 비밀스러운 목적지가 배아됐던 것이다.

정수진은 프랑스 유학에서 인생의 귀감이 되는 인물을 만난다. '손가락 작업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철학적 명제를 던져준 이는 파리 벨빌 국립건축대학에서 만난 앙리 시리아니(Henri Ciriani·1936~)이다. 스승 앙리 시리아니는 '사르코 집합주거' 등 공동주택 작업을 많이 했다. 문제의 접근과 해결 방법은 논리적이나 결과물은 감각적이다. 국내에는 그에게서 배운 건축가, 건축 교육자들이 있다.

정수진은 5년 가까이 그의 지도를 받았다. 점, 선, 면, 볼륨, 공간의 연속성을 배웠다. 건축가는 자신이 그린 선을 설명할 줄 알아야 한다고 배웠다.

건축 설계는 남을 위해 자신의 손으로 하는 삶의 실천적 작업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아니다. 점, 선, 면의 작업을 통해 왜 그런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건축주가 좋다는 걸 이해하고 건축가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주택에 대한 관심은 10년이 넘었다. 정수진은 세컨 하우스로서의 전원주택이 아니라 도심형 단독주택에 주력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일산, 성남 등 서울 근교 도시, 주택 단지에서 시작됐다. 필지 단위 개발이 이뤄진 판교에서는 확실하게 붐으로 나타났다.

건축가 누구에게나 소중하듯 독립하고 나서 첫 번째 수주한 프로젝트도 주택이었다. 안은 열려 있고, 바깥은 둘러싸여 있는 형태와 구조를 띤 중정형을 택했다. 중정은 아파트 거주 공간의 마루에 해당한다. 성남시 판교동에 위치한 일명 '하늘집'(2011)은 지하 1층과 2층 구조다. 대지 면적 262㎡.

하늘집 / 사진제공= 건축사사무소 에스아이
하늘집 중정 / 사진제공= 건축사사무소 에스아이

마당을 가운데 둔 전통 민가 주택에서 이쪽 공간과 저쪽 공간을 이어주는 것은 툇마루였다. 어린아이들은 각이 진 구조에서는 폴짝 건너뛰기도 한다. 서양은 각각의 공간은 형태와 형태를 구획하는 벽들이 만드는 독립된 실 개념이다. 중정은 삶의 궤적을 추억하는 레트로(retro·복고)이며 부모 세대에 대한 오마주(hommage·반영)이기도 하다.

주택과 아파트 간 차이는 마당이 있느냐 없느냐다. 옛날 민가는 담을 쳤다. 신분과 경제적 능력에 따라 그 담이 돌이 되기도, 싸리가 되어 삶이 들여다보이기도 했다. 현행 건축법은 삶의 어쩔 수 없는, 알고 보면 슬픈 옛 정서를 강요한다.

두 번째도 판교동에 위치한 일명 '노란 돌집'(2012)은 2층 구조에 대지면적 191㎡. 격자 가로에 겹치는 예각과 둔각을 살렸고, 안에서 볼 때 어긋나는 외벽 빈 공간으로 거리 풍경이 들어오도록 했다.

노란돌집 / 사진제공 = 건축사사무소 에스아이
노란돌집 중정 / 사진제공= 건축사사무소 에스아이

2기 신도시 판교에서는 단독주택을 건축할 때 담장을 설치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관(官)은 '이웃 간 친밀히 교류(?)'되면 이상적 공동체 도시가 등장하는 줄 알았다. 주택 몸체를 담장 삼아 'ㄷ' 또는 'ㅁ' 자 형태로 지은 뒤 마당을 안으로 숨겨놓는 중정형 주택군(群)이 들어섰다.

신도시에 중정형 주택이 집중되는 건 지역 지구단위계획 때문이다. 단독주택 담장 높이는 1.2m로 제한된다. 더욱이 담장은 콘크리트나 벽돌이 아닌 살아 있는 나무로만 둘러야 한다.

중정은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단층 건물 구조에서만 가능하다. 대지면적이 작은 일본 주택 중정은 우리와는 또 다른 개념이다.

정수진은 욕조와 샤워룸만 타일을 깔고 주변 공간은 마루를 까는 유럽식 건식 화장실을 제안한다. 건식 욕실에는 바닥에 배수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건식 욕실은 습식 욕실에 비해 습기가 현저히 적기에 곰팡이의 원인이 되는 세균 번식이 적고 물때가 생기지 않아 청결함을 유지하기 편하다.

우리 주택 구조에 익숙했던 사용자들도 두 달만 지나면 잘 적응한다. 관습, 고정관념, 선입견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게 주택이다. 사용자들이 생활 습관의 강박감을 버리지 않으려는 곳이 주택이기도 하다. 설계를 너머 새로운 문화, 생활 양식을 제안하고 설득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연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 1925~2018)와 데니스 스콧 브라운(Denise Scott Brown·1931~) 부부의 대표 작품은 '어머니의 집'(Vanna Venturi House·필라델피아)이다. '어머니의 집' 2층 지붕 벽에서 갑자기 멈춰버린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계단, 또 다른 벽난로를 끼고 올라가는 계단은 중간에서 폭이 반으로 줄어들고, 구조와 상관없는 불필요한 사선 형태로 인한 공간의 협소, 너무 큰 화로 등 불필요한 공간이나 장식이 있다. 말끔하며 기하학 조형미를 음미한 듯 장난스럽다.

이-집 복도 / 사진제공 = 건축사사무소 에스아이
대지면적 217.04㎡, 2층인 '이-집'(2015)에서 가장 특징적인 공간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빛이 드는 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계단처럼 보이는 머리 위 채광되는 '긴 복도의 텅 빈 공간'은 대부분 자가용이 없던 시대,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던 골목을 집 안에 들여놓은 듯하다.

정수진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간들은 화장실, 복도, 계단같이 보편적으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져 최소화되는 공간들이다. 건축가는 이러한 공간(space)을 일상의 삶이 이뤄지는 원초적 장소(place)로 본다. 화장실을 볼 일 보는 toilet이 아닌 bathroom, '방'으로 생각한다. 건축가가 설계한 화장실이 대부분 개방적이고, 투명한 유리로 돼 있다. 목욕하면서 외부로 열 수 있는 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 여성 사용자를 고려한 건축가의 감수성이 빛나는 지점이다.

정수진이 설계한 주택들은 담으로 둘러쳐, 매스감 있고 둔중한 폐쇄적 디자인을 띠고 있으나 기능상으로는 개방적이다. 한 번 썼던 재료는 잘 쓰지 않으려 한다. 주택 외피는 사암, 벽돌, 스투코(stucco) 등 매스감이 돋보이는 단일 재료를 주로 사용한다. 내부는 백색 페인트, 유리, 목재 등을 혼용한다.

'비례' 얘기를 잘 하지 않는다. 이유는 답도 없고 어려워서다. 비례는 적절한 장소에서 어떻게 변용되느냐의 문제다. 시공 과정에서의 오류나 수정도 비례를 찾는 과정이다. 비례는 가장 감각적인 언어다. 건축에서 '아름답다'는 표현은 딱딱 맞아떨어지는 수치로 평가하는 게 곤란하지만 수치를 대입하지 않을 수도 없다. 비례는 직관이나 감각이다. '뭐가 뭔지 모르지만 맞지 않는 것'을 비례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형태, 크기, 색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비례는 건축가만의 스타일이 가장 잘 드러나는 언어적으로 잘 표현할 수 없는 공간을 특징 짓는 '아우라'와 같은 의미로 와닿는다.

사무실을 열고 주택을 5~6채 지어 포트폴리오가 많아지니 편해졌다. 건축주에게 극단적 제안과 설득의 마지막 단계는 '일단 해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부숴줄게'다.

비슷해 보여도 주택 평면에는 온갖 디테일이 숨어 있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고 하지 않았나. 건축주, 건축가, 신이 3자 회담을 해야 주택 한 채가 지어진다. 건축가는 왜 선 하나가 더해졌는지 건축주와 신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건축가도 사례를 통해 성장한다. 건축주들이 재료의 물성 어쩌고 하면서 이웃들에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았다. 프로젝트 계약이 끝난 건축주가 건축가와의 만남을 통해 건축을 중심에 놓고 삶이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건 인생의 신비이기도 하다. 첫 주택 건축주의 딸이 자신의 건축사무소 에스아이(SIE) 직원이 됐다.

[프리랜서 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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