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씨 성'을 가진 마리나는 열아홉살이 너무 두렵다
'존재의 합법화' 경로 마련이 공동체에 남겨진 숙제
있지만 없는 아이들: 미등록 이주아동 이야기
국가인권위원회 기획, 은유 지음/창비·1만5000원
이런 아이들이 있다. 본인 명의 휴대전화를 개통하지 못해 학교 친구들의 단톡방에 참여할 수 없고, 단체로 간 청와대 견학에서도 혼자만 들어갈 수 없어 버스에서 기다려야 한다. 아이돌 가수의 콘서트 티켓을 구매할 수 없고,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간 떡볶이집에서 엔(N)분의 일로 계좌이체할 때 주섬주섬 현금을 찾는 아이들. 마리나, 페버, 김민혁, 카림, 달리아…. 국내 2만여명으로 추산되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이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한국에 들어오거나, 한국에서 태어났다. 부모 고향보다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길고,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쓰고 한국 문화에 익숙하다. 또래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한가지, 주민등록번호가 있는지 여부뿐인데, 이 차이로 인해 이들은 좌절과 배제를 끊임없이 학습하게 된다.
고3인 마리나는 한국에서 태어난 몽골 국적이다. 친구나 선생님들은 그가 ‘마씨 성’을 가진 한국인이라고 알고 있을 정도로 또래들과 다르지 않은 외모와 표정, 말투를 갖고 있다. 사회복지사를 꿈꾸던 마리나는, 지난해 가을 인터뷰에서 자포자기한 심정을 내비쳤다. “지금은 미래에 대한 생각을 아예 안 해요. 열아홉살이라는 나이가 너무 위태로워서 제가 제 스스로를 잡고 있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저는 한국에서 유령으로 지내온 거나 마찬가지예요.” 한국 정부는 미등록 이주아동이 만 18살이 지나면 체류 자격을 박탈하고 본국으로 송환해 왔다. 마리나는 몽골 말도 할 줄 모른다.
카림과 달리아 남매도 비슷하다. 이들은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각각 4살과 2살에 한국에 정착했다. 이들에게는 한국에서 태어난 셋째와 막냇동생이 있다. 4남매가 모두 미등록 이주아동들이다. ‘역사 덕후’였던 카림은 고2 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응시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본인이 처한 상황을 마음 깊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수능시험을 포기한 카림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로 생활비를 벌고 있다.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생들만은 체류 자격을 얻기를 기대하며 불안한 삶을 견디지만, 한번씩 “속울음”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태어난 건 죄가 없는데 왜 차별 당하고 고통받고 꿈도 못 이루고 살아야 하는지 솔직히 이해가 잘 안 돼요.”
그간 국가 폭력과 성폭력 피해자 등 사회적 약자들의 낮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 온 은유 작가는 미등록 이주아동 5명과 이들 곁을 지키는 이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담아 <있지만 없는 아이들>을 빚었다. 글쓰기의 원동력이었던 분노와 감동이 바닥난 것 같아 ‘절대 안정’ 팻말을 붙여놓고 스스로 휴업을 선언했다던 작가는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닌데 기를 쓰고 사는 작은 인간들”의 이야기에 다시 펜을 들게 됐다.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는 아이들의 평등을 지켜주는 게 공적 지원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 다이어리 첫 장에 적어두고 늘 곱씹었다는 일본 사회학자 미나시타 기류의 말이 그의 어깨를 떠밀었을 것이다.
지은이는 미등록 이주아동들이 한국에 뿌리 내리게 된 배경에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노동력 수요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한쪽의 필요만으로 유지되는 관계란 없기” 때문이다. 1990년대 산업화의 진전과 소득 수준의 향상으로 ‘3디(D)’ 업종의 인력난이 가시화되면서 정부는 1993년 산업연수생제를 도입했다. 초기 2만여명 수준이었던 연수생은 점차 확대돼 2002년 14만5500명으로 늘었다. 이 제도는 2004년 고용허가제로 바뀌었고, 체류 기간도 점차 늘어 9년10개월까지 연장됐다. 이주노동자의 지속적 공급이 요긴했던 산업 현장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된 결과다.
한국 사회가 필요로 했던 것은 이들의 ‘값싼 노동력’뿐이었다. 한 사람이 낯선 사회에 진입했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는 여러가지 요소들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외떨어진 공간에서 9년 넘게 살다보면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만나고, 자연스레 가족이 탄생할 수 있다는 가능성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이런 폭력에 가까운 무관심의 결과물인 법제도의 공백지에서 유령처럼 2만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제 그 아이들이 이렇게 묻는 것이다.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게 그렇게 과한 욕심인가요?”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도 미등록 이주아동을 지원하는 일이란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새로운 상황”에 대처하는 일이다. 예를 들면 한국은 만 18살 미만 아동의 학습권을 보장하고 강제 이송 등을 금지하는 유엔(UN)아동권리협약에 일찌감치(1991년) 가입했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 줄도 모르고 미등록 이주아동을 함부로 단속하고 내쫓았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율형사립고에 다니던 몽골 국적 이주아동이 경찰에 붙잡힌 지 나흘 만에 강제 출국을 당했던 2012년 ‘민우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 사건에 분노한 민우의 담임 선생님이 경찰과 법무부에 항의하고, 시민단체가 함께 나서고, 언론이 이를 조명하고, 정치권이 반응한 뒤에야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이주아동을 강제 추방하지 않겠다는 방침이 만들어졌다. 그때 민우의 담임 선생님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눈감았다면, 미등록 이주아동들은 지금까지도 언제건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아버지의 고향 땅으로 쫓겨날 수 있다는 공포 속에 살아야 했을지 모른다.
이 책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극한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사람들의 용기와 슬픔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먼저 슬퍼한 자, 깊이 슬퍼한 자, 끝까지 슬퍼한 자들이 슬픔에 짓눌리지 않고 슬픔을 말하는 것으로 세상이 조금씩 나아졌다. (…) 그렇게 슬픔은 보시가 된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
법무부는 이 책 출간을 위한 막바지 작업이 이뤄지던 2021년 4월 ‘국내 출생 불법체류 아동 조건부 구제대책 시행방안’을 발표했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를 이행한 조처다. 한국에서 태어나 15년 이상 체류한 미등록 이주아동에 한해 체류 자격을 신청하고 1년마다 갱신하도록 한 제도다. 한국에서 태어난 마리나는 체류 자격을 신청할 수 있게 됐다. 물론 매년 왜 한국에 남아야 하는지 입증하는 것은 마리나의 몫이다. 네살과 두살에 한국에 온 카림과 달리아 남매는 체류 자격을 신청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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