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주 작가..'내가 쓴 것 이상을 읽어 주는' 독자와 함께 쓰다

최재봉 2021. 6. 25.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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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작가 조남주의 첫 단편집 <우리가 쓴 것>
다양한 연령대 여성들 삶 다룬 '확대된 여성 서사'
등단 10년 만에 첫 단편집 <우리가 쓴 것>을 펴낸 작가 조남주. “다시 읽고 쓰며 그동안 무엇이 보였고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떻게 움직여 왔는지 돌아볼 수 있었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민음사·1만4000원

“그리 급진적일 것도 과격할 것도 없는 소설은 너무 많은 말들에 휩싸였다. (…) 적의는 호의보다 훨씬 힘이 셌다. 내가 하지 않은 말들이 따옴표 안에 들어가 인터뷰 기사에 실렸고, 내 소설에 있지도 않은 문장과 에피소드가 인터넷 리뷰에 올라왔다.”

조남주의 소설집 <우리가 쓴 것>에 실린 단편 ‘오기’에서는 어쩐지 작가 자신의 육성이 들리는 듯하다. 책 뒤에 붙인 ‘작가의 말’에서 작가가 “‘오기’의 에피소드들이 모두 제 경험담은 아”니라고 밝혔음에도, 고약한 독자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설가 ‘나’와 조남주 자신을 한사코 포개 놓고자 하는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한국 사회의 페미니즘 지형도를 바꿔 놓은 작품으로 평가받는 문제작 <82년생 김지영>을 내놓고 그가 시달렸을 몰이해와 공격 그리고 그에 대한 작가 자신의 심경을 이 소설 속에서 확인하고 싶어진다.

“다른 여성 작가의 훌륭함을 말하기 위해 내가 비교 대상으로 끌려 나오거나 비평과 논쟁과 담론 안에서 내 소설이 납작한 퍼즐 조각으로 잘려 끼워 넣어진 일은 셀 수도 없다. 내가 살아온 길고 복잡한 시간과 지금 수행하고 있는 여러 역할과 글을 쓰는 사람이자 생활인으로서의 다양한 고민과 각각의 고민에서 시작된 모두 다른 글들이 간단하게 요약되어 함부로 호명되고 있었다.”

2016년 10월에 처음 출간된 뒤 지금까지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란과 소동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앞선 인용문들은 사실상 조남주 자신의 목소리로 들릴 법도 하다. ‘오기’는 인터넷 악플을 단 이들을 “악의도 선처도 없”이 고소하겠다는 소설가 ‘나’의 다짐으로 시작한다. “단순 욕설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위협, 성적인 표현을 함께 쓴 경우를 우선 선별했”음에도 대상자가 수백 명에 이르고, 한 경찰서에 한꺼번에 접수하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을 것 같아서 다섯 곳으로 나누어 접수하기에 이른다. “내가 직접 가서 했다.”

소설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이렇듯 작품에 불만을 품고 모욕과 협박을 일삼는 악플러들만은 아니다. 이 소설 속 소설가는 고교 시절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선생님의 부탁으로 대학에 초청 강연을 가는데, 행사 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선생님이 성장기에 아버지한테 맞았다는 고백을 듣고 그로부터 촉발된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 가정 폭력을 다룬 자전적 소설을 발표한다. “내 얘기를 쓴 것은 처음이었다.”

소설가는 자신을 때렸던 오빠나 다른 가족이 소설을 읽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워하지만, 정작 사달은 엉뚱한 쪽에서 난다. 선생님이, 자신이 들려준 이야기를 제자 소설가가 훔쳐다가 소설로 썼다고 항의하고 나선 것. “선생님은 내가 당신 아버지의 무능한 부분과 폭력적인 부분을 분리해 ‘아버지’와 ‘오빠’라는 두 개의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경험을 훔쳐다가 소설로 썼다며 작가의 주변 사람들이 항의하고 고발하는 사례가 최근 부쩍 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작품 ‘오기’는 특히 흥미롭게 읽힌다. 소설 말미에서 소설가는 선생님께 메일을 쓴다. “나는 내 경험과 사유의 영역 밖에도 치열한 삶들이 있음을 안다고, 내 소설의 독자들도 언제나 내가 쓴 것 이상을 읽어 주고 있다고 쓴다.” 이 소설집에는 ‘우리가 쓴 것’이라는 제목을 지닌 수록작이 따로 없는데, 소설이란 작가와 독자가 ‘우리’가 되어 함께 쓰는 것이라는 뜻을 담은 ‘오기’의 이 대목에서 책 제목이 지닌 의미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수록작 가운데 ‘현남 오빠에게’는 2017년 11월에 출간된 여성 작가들의 합동 페미니즘 소설집 표제작이기도 했다. 대학 신입생 시절부터 10년째 사귀었고 최근 청혼을 한 현남 오빠에게 주인공 여성이 쓰는 거절 편지가 소설 본문을 이루는데, 자신이 연애와 보살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가스라이팅’이라는 심리적 조종이었음을 깨달은 주인공이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 강현남, 이 개자식아!”로 편지를 끝맺는 결말이 통쾌한 충격을 선사한다.

‘오로라의 밤’과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나란히 여성 삼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오로라의 밤’에서 쉰일곱 살 교사인 주인공은 팔순이 가까운 시어머니와 단 둘이 살면서 함께 캐나다로 오로라 관찰 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그런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어린이집에 다니는 제 아이를 맡기려다 실패한 딸은 “엄마는 나 할머니한테 맡겨 놓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았으면서”라는 원망의 말을 늘어놓는다.

‘여자아이는 자라서’의 주인공 여성은 중학생인 딸 주하가 연루된 성희롱 사건으로 가해자 남학생 엄마의 증언 요청을 받고 갈등한다. “성적이 좋은 남학생들을 주저앉히려는” 여학생들의 ‘함정’이라는 남학생 엄마의 주장이 한편에 있다면, “지금 엄마는 남자애들은 생각이 없다, 이해해 줘야 한다, 몰래 사진 찍고 낄낄거리는 게 장난이다, (…) 그런 한심한 소리나 하는 사람이 됐다고. 그러니까 엄마, 업데이트 좀 해”라며 반발하는 딸이 다른 한편에 있다. 제가 친구와 짜고서 ‘함정’을 판 게 사실이라는 주하의 고백이 생각하고 토론할 거리를 주는 한편에서는, 일찍이 보수적인 소도시에 가정 폭력 상담소를 열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던 주인공의 엄마가 외손녀 주하를 키우고자 “한순간 모든 것을 놓았다”는 부차적 스토리는 여성에게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얼마나 복잡하고 지난한 맥락을 지니는지를 알게 한다.

올 초에 발표한 ‘첫사랑 2020’이 코로나 시대 초등학생들의 힘겨운 풋사랑을 귀엽게 그렸다면, 2012년에 발표한 작가의 첫 단편 ‘미스 김은 알고 있다’는 “정해진 일이 없는 대신 모든 일을 했”던, 직장의 약자 미스 김의 해고 이후 벌어진 미스터리한 사건을 콩트적 발상에 담은 작품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첫 단편집 <우리가 쓴 것>을 낸 작가 조남주.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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