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노출이 '음란'한가요?
"여성의 몸에 자유를" 메시지 전달하는 강력한 표현
우리 좀 있다 깔 거예요: 혐오와 차별을 벗어버린 여성들의 가슴해방운동 이야기
여여 지음/이매진·1만8000원
<우리 좀 있다 깔 거예요>는 ‘불꽃페미액션’ 회원이자 여성학 연구자인 여여가 쓴 책이다. 가슴해방운동의 역사를 한국 안팎으로 두루 살핀 1부, 불꽃페미액션의 가슴해방운동 이야기가 2부에 실렸다. 2018년 불꽃페미액션은 서울 강남 한복판 페이스북 코리아 앞에서 상의 탈의 퍼포먼스를 벌였다. 불꽃페미액션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린 가슴해방 퍼포먼스 사진이 음란물이라는 이유로, 페이지가 아예 삭제된 데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왜 가슴을 노출하는 퍼포먼스를 하는가?
2008년에 우크라이나 페미니스트 4인이 만든 단체 ‘페멘’은 우크라이나의 성매매를 비판하는 퍼포먼스가 상의 탈의 시위 이후 주목받자 유사한 시위를 이어갔다. 미국 토플리스 운동에 앞장선 피닉스 필리는 2004년 뉴욕 마라톤 대회에서 윗옷을 벗고 달렸다. 토플리스를 할 때 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다가 실용적이라고 말해서 유명해졌다고. 이후 토플리스로 산책하거나 해변에서 윗옷을 벗고 있다가 잇달아 체포됐는데, 벌금형을 선고받자 납부를 거부했다. “나는 남성에게는 합법적이지만 여성에게는 합법적이지 않은 행위에 물리는 벌금은 내지 않겠다.” 한국의 1세대 여성 행위 예술가이자 원로 서양화가인 정강자는 1968년 5월30일, 종로의 한 음악 감상실에서 정찬승, 강국진과 함께 ‘투명풍선과 누드’라는 퍼포먼스를 했다. 정강자는 팬티 외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고 등장했다. “독재 정권의 억압과 사회 부조리에서 벗어나려는 여성 해방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상의 탈의 퍼포먼스는 가장 비폭력적인 동시에 가장 강력한 표현 방법이라는 말이 여러번 강조된다.
<우리 좀 있다 깔 거예요>는 가슴해방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기도 하지만, 불꽃페미액션의 가슴해방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인터뷰집이기도 하다. 불꽃페미액션의 회원과 비회원을 아우른 인터뷰는 가슴해방운동이 어떤 의미이고 왜 필요한지에 대해 각자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한국에서 불꽃페미액션만 가슴해방운동에 나선 것은 아니다. 2014년 페멘 코리아 토플리스 시위, 2014년 한국여성민우회 ‘이것또시위’와 관련한 인터뷰 등은 어떤 이유로 어떤 방식의 퍼포먼스가 실행되었는지를 다루었다. 예를 들어 여성민우회의 이것또시위는 홍대에서 가슴에 큰 눈을 그리거나 옷 위에 유두를 그리고 행진하는 방식이었다. 이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는데, 민우회 활동가의 말이 흥미롭다. “여성들은 공감대가 당연히 높았는데, 민우회는 대중적 여성운동을 지향하기 때문에 악플도 일종의 반응 차원이니까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아요. 오히려 무반응이 더 부정적이죠.”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여성의 몸에 자유를 주자는 말 백마디보다 가슴 노출이라는 퍼포먼스가 더 확실한 ‘반응’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가슴 해방 이슈가 상의 탈의 퍼포먼스하고만 연결되지는 않는다. <우리 좀 있다 깔 거예요>에서는 탈브라 이야기도 여러번 나온다. 남자들이 많은 현장에서 일하기 때문에 처음에 조심스러웠다는 사람도 있고, 직장에 우연히 브라를 안 가져간 날을 시작으로 유니폼을 입을 때 브라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온라인 액티비즘의 장점과 과제에 대해서도, 악플과 미디어 대응에 관해서도 이야기가 오간다. 관심을 더 표현하는 방법으로서의 댓글 달기 혹은 여성혐오적인 댓글에 ‘싫어요’ 누르기 등도 언급된다.
불꽃페미액션은 가슴해방운동이라는 하나의 명칭을 고수하는 대신, 원할 때마다 다양한 뉘앙스를 주는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불꽃페미액션의 활동가 가현은 이렇게 설명한다. “누구든 쉽고 가볍게 받아들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는 ‘찌찌 해방’을 썼어요. 뭔가 벗는 액션, 메시지에 집중하고 싶을 때는 ‘상의 탈의’라는 용어를 썼죠. 좀 무게 있어 보이면서도 너무 진지하지 않은 표현을 고르다보니까 ‘가슴 해방’을 쓴 거죠.” 또한, 상의 탈의 퍼포먼스가 있은 뒤 다른 활동가들이 너무 과격하다고 지적해 논쟁을 했다는 이야기도 실려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정답을 찾아 모두가 행복해졌습니다’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윤슬의 인터뷰는 불꽃페미액션의 운동 방식이 지닌 자유로움을 잘 드러낸다. “모든 운동이 다 운동처럼 보일 필요는 없어요. 신념 덩어리일 필요가 없거든요. 겨드랑이 털처럼 자연스러운 거니까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자연스럽게 보여주면 된다고, 가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방송에 나갈 때 모자이크나 블록 처리는 윤리적으로 써야 하는 효과거든요. 이를테면 범죄자 가릴 때 모자이크를 쓰잖아요. 가슴 가릴 때 모자이크를 쓰고 싶지는 않거든요.”
이 책은 질문하고 행동하는 일이 페미니즘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어떻게 하면 여성이 자신의 몸을 아름다움만이 아닌 기능과 자기애의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을지를 담았다. 인터뷰에 응한 사람 중 채은은 상의 탈의 퍼포먼스에 참여하는 이들의 신체가 다양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정상 가슴’이라는 범주 안에 든 사람이어서 쉽게 벗을 수 있었다는 거죠. 나는 음란물이 아니다, 내가 원하면 내가 벗을 수 있다는 건데, 이를테면 가슴에 흉터가 있는 사람, 유방암 수술을 해서 한쪽 가슴만 남은 사람, 심장 수술을 한 흉터를 지닌 사람은 없었거든요. 범주를 넓히면 휠체어 탄 여성, 휠체어를 타지 않는 장애 여성, 퀴어들이랑 함께 하면 좋겠어요.” 마지막 인터뷰이로 나선 유자녀 기혼 여성들의 목소리는 임신, 출산, 수유를 거치는 가슴의 모양과 건강에 대해 들려준다. 특히 모유 수유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면 느끼게 되는 죄책감을 비롯한 대목이 인상적이다. 엄마라면 모유 수유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출산 후 자신의 몸을 돌보는 것만큼이나(혹은 그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는, 책의 앞부분에서 이야기하는 가슴 해방과 같은 맥락에 놓인다.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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