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과학 단일이론의 승리는 없었다

한겨레 2021. 6. 25.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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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H2O인가: 증거, 실재론, 다원주의
장하석 지음, 전대호 옮김/김영사·2만9800원

물론 물은 H₂O이다. 물 분자가 수소(H) 원자 둘과 산소(O) 원자 하나의 결합임은 오늘날 너무나 자명한 과학 상식이다. 그런데도 뻔한 상식을 의문형으로 다시 묻는 책 <물은 H₂O인가>는 물과 수소, 산소의 과학적 사실이 구축되기까지 그 역사가 그렇게 간단하고 선명하지는 않았음을 말해준다.

지은이인 과학철학자 장하석 교수(영국 케임브리지대학)는 책에서 18, 19세기에 벌어진 유명한 화학 논쟁들을 천착한다. 18세기 앙투안 라부아지에(1743~1794)의 혁신적 이론과 조지프 프리스틀리(1733~1804)의 낡은 이론이 격돌하며 벌어진 ‘산소냐 플로지스톤(가설적인 가연성 입자)이냐’의 논쟁, 그리고 19세기에 물의 전기분해 실험을 둘러싸고 벌어진 ‘물은 화합물이냐 원소냐’의 논쟁이 책의 중심 줄거리를 이룬다.

과학사에서 두 논쟁의 결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라부아지에의 혁신적 화학이론은 근대 화학의 출발인 화학혁명으로 나아갔으며 낡은 플로지스톤 이론은 과학의 무대에서 밀려나 아득하게 기억될 뿐이다. 19세기 중반에 물의 분자식은 H₂O임이 더 의심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로 밝혀졌다. 화학혁명의 승리는 분명했다.

하지만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지은이는 과학사에서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던 논쟁의 다른 장면을 찾아내고 들추어내어 보여준다. 라부아지에의 화학이론은 승승장구했지만 여전히 많은 허점을 지녔으며 때로는 잘못된 이론(‘칼로릭’)을 동원하기도 했다. 반면에 플로지스톤 이론은 낡은 과학으로서 무대에서 밀려났지만 쉽게 폐기할 수 없는 이론적 설명의 장점도 지니고 있었다. 장 교수는 “플로지스톤 이론은 때 이르게 살해되었다”며 “플로지스톤과 (라부아지에의) 산소 이론이 상호작용했더라면 얻어졌을 혜택들”을 이야기한다.

책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장면은 산소와 수소 원자를 볼 수도, 셀 수도 없던 19세기에 물이 H₂O라는 사실이 어떻게 규명될 수 있었는지 그 과정을 세밀히 추적한다. 산소와 수소가 거리를 두고서 따로 생성되는 물의 전기분해 과정을 이해하려는 많은 시도가 이어졌으며, 물의 분자식을 찾으려는 실험들이 이어졌다. 원자이론 제창자인 존 돌턴도 1808년에 물을 HO로 제시할 정도로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수소와 산소의 분자식을 확정하는 문제는 난해한 것이었다.

저자는 H₂O의 합의 과정에 서로 다른 갈래의 여러 지식 시스템이 활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나의 지식 시스템이 이룬 ‘통일’의 과정이 아니라 다원적 지식 시스템을 활용하는 ‘재구성’의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18세기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혁신적 화학 이론에 밀려나 사실상 폐기된 플로지스톤 이론의 화학자 조지 프리스틀리가 행한 기체 실험의 장치들. 출처: 프리스틀리, <여러 가지 기체에 관한 실험과 관찰>(1775)

책의 절반은 과학사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과학철학으로 이루어졌다. 18, 19세기 화학혁명과 H₂O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1~3장도 흥미롭지만, 거기에서 끄집어내는 지은이의 철학적 사유가 펼쳐지는 4~5장은 더욱 눈길을 끈다. 장 교수는 화학의 역사 연구에서 얻은 그만의 ‘능동적 실재론’을 제안한다. 그는 “실재란 탐구하는 사람의 의지에 종속되지 않는 모든 것이며, 앎이란 실재의 저항으로 인해 좌절하지 않고 행위하는 능력”이라며, 능동적 실재주의로 세상을 볼 때 “우리가 과학에서 심지어 진리를 알지 못하더라도 성공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더욱 강조하는 ‘다원주의’도 되새겨볼 만하다. 과학의 역사에서 성공한 단 하나의 지식 시스템만을 기억하는 세태, 자연을 이해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일 뿐이라는 일원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그는 과학의 다원주의가 더욱 다양한 설명과 해법을 제공하여 궁극적으로 더 나은 과학의 발전을 도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은 2012년 영어로 먼저 출간돼 이듬해 과학철학 분야의 국제상을 받았는데, 국내에선 과학 전문번역자 전대호씨의 번역으로 출간됐다. 장 교수는 온도 측정의 기준을 마련하고 합의해가는 긴 과학 역사와 과학철학의 쟁점을 다룬 책 <온도계의 철학>(동아시아, 2013)의 저자로 이미 알려져 있다. 지금은 상식으로 굳어진 과학의 여러 장면을 들추고 거기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근본 물음을 퍼올린다는 점에서 두 책은 짝을 이룬다.

오철우 서울과학기술대 강사(과학기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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