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투어.."용서하지만,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안선희 2021. 6. 2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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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기 위해, 반복하지 않기 위해
목포·제주에서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대만까지
아시아 학살 현장 다니며 슬픔과 고통을 기록하다
인도네시아 페툴루 마을 바니안나무 제단. 그린비 제공

다크 투어: 슬픔의 지도를 따라 걷다
김여정 지음/그린비·1만3000원

전남 장흥 외딴 마을에 살던 증조할머니는 해가 질 때쯤이면 대문 앞 배롱나무 아래 앉아 신작로를 바라봤다.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할머니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저녁이 되면 쌀밥을 지어서 놋쇠 밥그릇에 가득 담아 아랫목 이불 속에 묻어두었다.” 그들이 기다린 이는 할머니의 오빠였다. 할머니는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도 “오빠”를 불렀다. 할머니의 오빠는 농민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됐고, 목포형무소에서 수형생활을 하다 한국전쟁 때 실종됐다. 할머니는 오빠의 시신이라도 찾으려 목포를 헤맸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다크 투어>는 지은이가 “하늘나라에서 애타게 오빠를 찾을 할머니에게 적어도 오빠의 마지막 행적을 알리고 싶어” 목포로 향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목포형무소는 이미 아파트 단지로 변해 있었다. 할머니의 오빠는 ‘목포형무소 학살 사건’ 때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될 뿐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뒤 철수하던 경찰이 수형자들을 전남 신안군 인근 해상에 수장한 사건이다.

목포형무소 전경(1930). 그린비 제공

지은이는 목포를 시작으로 영암 구림마을 학살 사건, 영암 연보리마을 학살 사건의 현장을 걷는다. 장흥에 도착한 지은이는 결심한다. 할머니의 오빠처럼 “국가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듣겠다고. “가족을 잃고 평생토록 가슴에 한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겠다고. 이후 지은이의 다크 투어(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는 인도네시아 발리, 말레이시아 바탕칼리, 대만 타이베이 등으로 확대된다.

인도네시아 발리는 ‘낙원’처럼 아름다운 관광지다. 하지만 발리 바닷속 산호초에는 지금도 유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바다뿐 아니라 육지에서도 유골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1965~1966년 ‘인도네시아 대학살’의 희생자들이다. 수하르토 군부 정권이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켜야 한다’며 대학살을 자행했다. 공산당원뿐 아니라 당원으로 의심된 사람들까지 모두 죽였다. 당시 공산당 본부가 있었던 발리는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지은이가 페툴루 마을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힌두교 크리슈나신이 머문다는 바니안나무 앞 제단에 음식을 올리고 있었다. 고등학생이었던 할머니의 아들도 타멕(민병대)에 끌려갔고 시신을 못 찾았다. 할머니는 하루 세번씩 음식을 마련한다.

말레이시아 바탕칼리 마을 공동묘지. 그린비 제공

“용서하지만 우리는 기억할 것이다.” 평화공원을 만들기 위해 수십년 동안 돈을 모아 땅을 샀다는 말레이시아 바탕칼리 마을 사람들이 위령비에 새길 글귀다. 1948년 영국군은 공산 게릴라를 색출한다며 바탕칼리 고무나무 농장에서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을 사살했다. 바탕칼리 공동묘지에 있는 작은 묘비의 주인은 일곱살 아이였다. 방학 동안 아버지를 돕다가 목숨을 잃었다. ‘바탕칼리 학살 사건’은 2012년 영국 법원에 제소됐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기각됐다.

타이베이는 ‘또 다른 광주’였다. 1947년 2월28일 국민당은 실정에 분노해 시위를 벌이는 비무장 시민들을 대상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살육을 자행한다. 공식발표된 희생자 수만 2만8000명이다. 타이베이 라디오 방송국을 점령했던 시민들은 “정의를 위해 싸워달라”고 방송한다. 마치 5·18 시민군이 “광주 시민 여러분, 계엄군이 오고 있으니 도청으로 와주십시오” 하고 외쳤던 것처럼.

제주도 너븐숭이의 애기무덤. 그린비 제공

여정은 제주에서 마무리된다. “다크 투어라는 여행 목표에 맞는 장소를 구태여 찾지 않더라도, 제주도는 온통 학살지였다. 눈 안에 들어오는 오름, 바다, 들판, 한라산 등허리까지 학살이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알려진 제주4·3이지만, 지은이가 표선 가시리 마을, 성산 난산리 마을, 다랑쉬굴 등 학살 현장을 걸으며 주민들에게 전해 듣는 기억들은 여전히 처참하다.

긴 여행을 마친 지은이는 말한다. “다시는 지구상에서 이념과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학살은 기록되고 진상규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잊히지 않고, 반복되지 않는다.”

어둡고 슬픈 이야기이지만, 지은이의 진정성과 솔직함이 어우러진 문체로 전달되면서 따뜻함이 더해진다. 유족, 생존자들과의 지속적인 관계에서 나오는 생생한 증언들도 장점이다. 제28회 전태일문학상 르포 분야 수상작이다.

안선희 기자 shan@hani.co.kr

“기록하지 않으면 잊혀진다”
‘다크 투어’ 김여정 작가 인터뷰
김여정 작가. 김여정 제공

<다크 투어>의 김여정(47) 작가는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영국지부, 동티모르 독립투표 선거감시단원 등 엔지오 활동가로 일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강다리 폭파를 기록한 <그해 여름>으로 2020년 제주4·3평화문학상 논픽션 부문을, <다크 투어>로 2020년 전태일문학상 르포 부문을 수상했다. 다음은 <한겨레>와의 전화인터뷰 내용이다.
―여행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책에도 썼듯이 할머니 오빠의 마지막을 찾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나를 키워주신 분이다.
―한국 외에도 인도네시아, 발리, 대만의 학살을 기록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나.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 정도 걸렸다. 사전 취재 등 준비가 많이 필요했다. 아시아 학살에 대해서는 자료가 많지 않다. 현지 뉴스, 유족회, 외국 도서관 검색 등을 통해 자료를 수집했다. 현지어도 어느 정도 말할 수 있게 공부했고, 한 나라를 최소 두번 이상씩 방문했다.”
―아시아 학살에 공통점이 있나.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다. 대부분 반공정권이 들어서면서 조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해자들이 처벌받지 않았다. 고위직에서 평생을 잘 살았다. 유족과 학살자가 이웃에서 사는 경우도 있다. 가해자들도 말을 하지 않고 피해자들도 증언을 꺼린다.
―책이 얇고, 문체도 대중적이다.
“일부러 원고의 많은 양을 줄였다. 학살은 솔직히 일반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주제는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가 읽었으면 했다. 서점에서도 학살 관련 쪽이 아닌 여행서 쪽에 꽂혔으면 한다.”
―지금은 어떤 작업을 하고 있나.
“한강다리 폭파 뒤 용산폭격에 대한 증언들을 수집 중이다. 지금까지 120명 정도 인터뷰를 했다. 증인들이 대부분 80대 중반 이상이다. 시간이 얼마 없다.”
―학살 기록 작업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록으로 남겨야 잊히지 않는다. 특별히 교훈같은 것을 덧붙이지 않아도 된다. 순수한 기록이 기억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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