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공대는 무슨" 오랜 편견 넘어서려면
(14) 과학기술 정책과 여성
실력 강조되는 여성 롤 모델에 압도되는 이공계 여학생들
성비불균형 현상은 '실력이 문제'라는 능력주의조차 역행
“저는 과학고에 다니는 평범한 여고생입니다. 그간 저를 쳐다보지도 않던 친척들이 제가 과학고에 합격하면서부터 갑자기 이런저런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가 무슨 공대냐’부터 ‘여자는 공대에 가면 체력이 달려서 힘들다’, ‘평범하게 의사나 선생이 돼서 좋은 남편 만나고 자식 낳는 게 제일이다’ 같은 말을 조언이라고 합니다.”
2017년 ‘이공계 내 성차별 아카이빙 프로젝트’에 제보된 이 사연은 고등학교 때 이과를 택하거나 공대 진학을 원하는 여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을 법한 경험을 담고 있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늘 장손인 사촌 오빠의 뒷전에 있던 이 여학생은 과학고에 진학하면서 처음으로 친척들의 관심을 받는다. 그런데 그들의 조언은 격려나 지지와는 거리가 멀다. 과학기술인이 되기를 꿈꾸는 여학생은 대학에 진학하기 전부터 극복해야 할 것이 많다.
29.2%라는 평균치에 숨겨진 사실
이런 사연을 접하고 나면 과학기술계에 여성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2020년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에서 발간한 <2010~2019 남녀 과학기술 인력 현황> 보고서를 보면 2019년 이공계 학과에 입학하는 대학생 중 여성 비율은 29.2%로 70.8%를 차지하는 남성의 절반에 못 미친다. 애초부터 많지 않은 이공계 여성 수는 직급이 올라갈수록 더 줄어든다. 대학 졸업 후 과학기술인의 진로를 밟아 관리자 직책까지 올라가는 여성 비율은 10.6%에 불과하다. 낡은 수도관에서 물이 스멀스멀 새어 나가듯, 이미 과학기술계에 발을 들인 여성들조차 이 분야에 오래 남지 못한다.
또 다른 문제는 29.2%라는 수치가 단지 평균을 뜻할 뿐이라는 점에 있다. 대학 이공계 학과를 자연과학 계열과 공학 계열로 나눌 때, 두 계열에 속하는 여학생 비율은 각각 52.3%와 25.1%로 큰 차이를 보인다. 비교적 성비 균형을 이룬 듯 보이는 자연과학 계열과 달리 공학 계열은 여전히 4명 중 3명이 남학생이다. 자연과학 계열 내에서도 의상학과나 식품영양학과처럼 여학생이 전체의 약 80%를 차지하는 전공이 있는 반면 같은 계열의 물리학과는 그 비율이 27%, 공학 계열의 자동차공학과는 7%에 불과한 정도다. 이처럼 이공계 학과 여성 입학생 비율 평균치는 전공 사이의 격차를 숨기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전공 간 격차는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거나 변하지 않았다. 여학생 비율이 평균에 못 미치는 학과는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2012년에 여학생 비율이 30%가 안 되는 학과로 보고된 전공은 자연과학 계열의 물리학과와 공학 계열의 자동차공학·기계공학·전자전기공학·반도체공학·건축공학·정보통신공학·컴퓨터공학 등으로, 이러한 현상은 2019년 조사 결과에도 그대로 반복되었다.
여성 과학기술인 지원 정책 20년, 그 성과의 이면
과학기술계의 성비 불균형 현상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거의 예외 없이 나타난다. 미국과 유럽 등 다수의 국가는 과학기술계 인력을 수급하고 인재를 유치할 목적으로 여성 과학기술인을 육성하고 지원하는 정책을 펼친다. 우리나라 역시 2002년 관련 법률을 제정하고 2004년부터 꾸준히 ‘여성 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 기본 계획’을 시행해왔다. 이러한 정책의 목표는 더 많은 여성이 과학기술계에 유입되어 이탈 없이 경력을 유지하고 개발하도록 돕는 것이다.
‘기본 계획’과 같이 여성을 대상으로 한 정책의 성공 여부는 여성 인력의 양적 성장으로 평가된다. 2000년대 초에 10%대였던 과학기술 연구개발 인력 고용 인원 중 여성 비율이 2019년에 그보다 두배인 20.7%로 증가한 것은 이 정책의 분명한 성과다. 그러나 성과의 이면을 들추면 그곳에는 자연과학 계열과 공학 계열의 서로 다른 성비 격차, 여학생이 다수인 전공과 남학생이 다수인 전공의 뚜렷한 구분이 여전하다. 공학 분야의 여성 인재를 양성하려는 별도의 사업을 추진해왔음에도 말이다.
연세대학교 공학교육혁신센터 소속 한경희 교수 연구팀은 2010년 공과대학 여학생을 대상으로 한 지원 사업의 효과를 분석한 논문에서 해당 사업이 여학생 집단을 부각시켜 남녀 학생 모두에게 저항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을 지적했다. 남학생은 여학생에게 특화된 정책을 여학생에게만 주어진 특혜로 여기고, 여학생은 이 정책이 여성을 배려가 필요한 열등한 존재로 규정한다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학생과 여성 과학기술인을 지원하는 정책이 과연 필요한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흔히 과학기술계야말로 능력이 가장 중요한 분야이므로 결국 “성별이 아니라 실력이 문제”라고들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능력주의자들은 압도적인 실력으로 유리 천장을 뚫은 여성 과학기술인의 사례를 곧잘 언급한다. 그들은 특정 계열과 전공에서 여학생 비율이 지나치게 낮거나 여성 과학기술인의 수가 관리자 직책으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현상을 개인의 능력 차이로 설명한다. 그 정도 비율의 여학생과 여성 과학기술인만이 동료 남학생과 남성 과학기술인에 견줄 능력을 갖췄다는 식이다.
물리학과는 똑똑한 남성만 간다?
능력주의자의 시각에서 과학기술 여성 정책은 실력이 모자라는 여학생을 과학기술계에 불러 모으려 정작 실력 있는 남학생을 억울하게 밀어내는 정책처럼 여겨질 수 있다. 언뜻 그럴싸해 보이는 이 주장을 점검하려면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간 국내외에서 진행된 이공계 남녀 학생에 관한 연구는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자신의 능력에 더 자신감을 보인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그렇다면 남녀 학생의 실제 능력은 어떨까?
지난해(2020년)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미국 고등학생 5960명의 학업 성취도와 진로 선택을 7년간 추적 조사한 조지프 심피안 뉴욕대학교 경제 및 교육 정책 교수 연구팀의 논문이 실렸다. 이 연구는 미국 내에서 고질적으로 여학생 비율이 낮은 물리학·공학·컴퓨터과학 전공의 성비 불균형 현상에 초점을 두고 참가자의 고등학교 수학 및 과학 학업 성취도와 대학 진학 시 전공 선택 간 상관관계를 살폈다.
연구팀은 물리학 및 공학 계열 전공을 택하는 남학생이 모두 관련 과목 학업 성취도가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발견했다. 이와 달리 여학생은 학업 성취도가 높은 학생이 주로 이 전공을 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경향성은 수학과 과학 과목에서 100명 중 20등 위에 속하는 성적 상위권 여학생과 90등에서 100등 사이에 속하는 최하위권 남학생이 같은 비율로 물리학 또는 공학 계열 전공을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또한 상위 10% 이내인 최상위권에서 이 전공을 택하는 남녀 비율은 2 대 1 정도의 차이가 났으나 하위 10% 이하 구간인 최하위권에서 물리학과와 공학 계열로 진학하는 학생 수는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10배나 많았다.
여학생들은 애초에 물리학이나 공학 계열 전공을 희망했어도 최종적으로는 성적이 좋아야 이 전공으로 진학하지만 남학생들은 성적이 낮아도 혹은 애초에 물리학이나 공학 계열 전공을 원하지 않았더라도 해당 전공을 선택했다. 이는 물리학 및 공학 분야의 성비 불균형이 특히 심한 이유가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이 분야에 능력이 부족한 남학생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오기 때문임을 말해준다. 연구팀은 물리학 및 공학 계열 전공의 성비 불균형을 능력주의의 결과가 아닌 오히려 능력주의에 역행하는 현상으로 결론 내린다.
능력주의를 거스르는 현상은 과학기술계 전반에서 발견된다. 남학생은 자신의 능력이 어떠하든 주위에서 항상 자신과 능력이 비슷한 동료와 선배를 만날 수 있다. 반면 여학생은 뛰어난 실력이 강조되는 여성 롤 모델에 압도되기 일쑤다.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입증하거나 능력이 부족한 자신을 탓하며 스스로를 소모한다. 이러한 분위기가 지속되는 한 여성은 적절한 능력을 갖추어도 과학기술계 진입을 꺼릴 것이고 설사 진입했다고 해도 중도에 떠나기 쉽다. 그렇게 여성이 떠난 자리를 그와 능력이 비슷하거나 모자라는 남성들이 채워온 것이 오랜 성비 불균형의 원인이다.
2007년 미국 국가 과학상을 수상한 핵물리학자 페이 에이젠버그-셀러브는 이런 말을 남겼다. “하버드뿐 아니라 다른 어느 대학에도 이류밖에 안 되는 남자 교수가 많다. 나는 이류밖에 안 되는 여성 연구자가 대학 정년직을 받는 것을 보아야 비로소 성차별이 없어졌다고 믿겠다.” 과학기술계에 ‘성별이 아닌 실력’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야말로 성비 불균형 해소에 가장 앞장서야 할 이들이다. 과학고에 다니던 그 평범한 여학생이 평범한 공학자가 되고 평범한 여성 공학인 롤 모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끝>
숙명여자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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