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이 어딘지도 모르는 죽음..인천은 산재의 사각지대

이정하 2021. 6. 2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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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죽음, 산업재해]인천, 올해만 노동자 26명 추락·깔림 등으로 숨져
제도 있지만, 현장과 괴리감..수상한 원-하청 관계
50명 미만 영세사업장 94.5%..안전관리 사각지대
지방정부, 중앙 빈틈 '노동안전보건조례'로 메울까

금속 기계 제작을 하는 제관사 이아무개(54)씨는 지난달 24일 여느 때처럼 아침 7시15분께 집을 나섰다. 인천 남동구 남동공단 유류탱크 제조업체로 출근한 그는 오전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은 뒤 아내와 카카오톡으로 ‘식사는 했는지’, ‘허리는 안 아픈지’ 등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오후 일이 막 시작된 1시45초, 그는 황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공장 천장에 고정된 크레인(2.8t)에 들려 있던 가로 3m, 세로 2.5m, 무게 500㎏짜리 냉연 철판이 갑자기 떨어져 깔렸기 때문이다. 공장 폐회로텔레비전(CCTV)엔 철판이 아래로 떨어져 사고가 나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다.

믿기지 않는 사고 앞에서 아내는 “30년 가까이 금속기계 설계 제작 기술자로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허망하다”며 “사고 당일 점심때 평소처럼 통화만 했더라면 사고를 피하지 않았을까”라며 통탄했다고 한다.

복잡한 하청 구조…‘고용관계’부터 선명하게

막막해진 생계보다 더 황당한 건 남편이 왜 목숨을 잃게 됐는지, 목숨을 앗아간 일을 맡긴 원청업체가 어디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는 복잡한 하청 구조 탓이다. 사고 사업장은 컨베이어 제작 기업인 한국콘베어공업㈜ 공장이지만, 이씨는 직원 4명이 전부인 대동산기 소속이다. 사고 크레인은 한국콘베어공업 소유지만, 대동산기는 공장 일부를 임대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동산기 대표는 유족 쪽에 “한국콘베어공업이 원청”이라고 밝혔다가, 나중에 “공장 내 입주한 다른 기업으로부터 하청을 받았다”고 말을 바꾼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한국콘베어공업 공장에는 대동산기 말고도 다른 제조업체들이 여럿 입주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뒤 산업안전보건 감독에 들어간 중부지방고용노동청은 대동산기가 하청 형태로 일해왔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고용관계 등을 조사하고 있다. 중부지방고용노동청 관계자는 “사고 원인 조사와 함께 두 기업이 맺은 임대차 계약이나 고용관계 등을 조사 중”이라며 “근로감독관 4명과 안전보건공단 전문인력 2명으로 감독반을 꾸려 업체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살피고 있다”고 말했다.

일터에서 추락·끼임·부딪힘 등 ‘허망한 죽음’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인천에선 이씨처럼 일터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숨지는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달 15일 서구 한 상가 신축공사장에서 협력업체 소속 60대가 전기점검 중 쓰러져 숨졌고, 앞서 4일에는 중구 연안동 8층 규모 물류센터 건물 옥상에서 폐자재를 치우던 50대 노동자가 10m 아래로 떨어져 사망했다. 지난달 27일에는 미추홀구 주안동 현대건설 아파트 신축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자가 굴착기에서 떨어진 200㎏짜리 돌덩이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배진교 정의당 의원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올해(1월~6월24일) 인천지역 산업재해 사고 현황을 보면 사망자는 21명에 이른다. 사망 원인별로는 추락이 9건으로 가장 많았고 끼임·깔림 5건, 부딪힘 3건, 감전 등 기타 4건이었다. 민주노총 인천본부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인천광역본부를 통해 추가 파악한 산재사고 사망자 5명(추락 4명, 베임 1명)을 포함하면 전체 사망자는 26명으로 늘어난다. 지난해 전체 인천지역 산재사고 사망자는 32명이었다. 노동계는 산재 은폐 등 통계로 파악되지 않은 사례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재하청 관행과 말뿐인 안전제도가 사고 배후

희생자 가운데 하청업체 소속이 많다는 점도 눈에 띈다. 고용노동부가 파악한 올해 상반기 인천 산재 사망자 21명 가운데 14명이 하청업체 소속 또는 하청업체가 고용한 일용직이었다.

배진교 의원실 최승원 보좌관은 “하청에서 납품 단가에 맞춰 작업하려면 안전관리는 뒷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남동공단처럼 하나의 공장 건물에 여러 영세업체가 운영하는 시설은 더욱 세밀하게 원-하청 계약관계를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했다. 원청업체가 수수료를 떼고 실제 일은 하청업체에 넘기는 이른바 ‘가격 후려치기’가 안전관리 소홀로 이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건설노동자들은 안전교육 및 관리·감독과 실제 현장 상황이 따로 논다고 했다. 일용직 건설노동자 정아무개(50대)씨는 “어떤 공사장에 가건 안전수칙이 있고, 교육받았다는 사인도 해야 한다”며 “그런데 실제 그렇게 교육하고, 그 내용대로 인력을 배치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귀띔했다.

박선규 민주노총 인천지역본부 조직국장은 “그동안 발생한 사고 유형을 보면, 건설 현장뿐만 아니라 제조업체 등에서 추락·끼임 등의 사고 대부분은 정해진 안전조처를 제대로 지키지 않아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가 중소사업장의 추락, 끼임 등 재래형 산재사고 예방을 위해 안전조처 준수 여부를 집중 점검하는 ‘패트롤 현장점검’ 제도를 운용 중이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지난 5월28일 배진교 정의당 의원이 용접 기술노동자 깔림 사망 사고가 발생한 인천 남동구 남동공단 한국콘베어공업㈜ 사업장을 둘러보고 있다. 배진교 의원실 제공

제도권 밖 50명 미만 영세사업장이 사각지대

영세한 사업장이 많아 안전보건 관리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천시 등록공장 1만2178곳 가운데 1만1511곳(94.5%)이 50명 미만이고, 5명 미만 사업장도 3803곳(31%)에 이른다. 50인 미만 사업장 고용인력은 12만797명으로 전체 고용인원의 55.6%를 차지한다.(인천시 자료)

김은복 노무사는 “현행 제도에서 50명 이상 사업체는 그나마 안전·보건관리자와 산업안전보건위원회와 같은 관리조직을 두고 고용노동부 관리·감독을 받지만 제도권 밖에 있는 50명 미만 사업체는 안전보건 관리의 사각지대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올해 초 국회를 통과한 중대재해처벌법에선 중대 산업재해 발생 때 5명 미만 사업장 사업주는 처벌 대상에서 제외했고, 50명 미만 사업장은 3년 동안 법 적용을 유예하도록 했다.

뒤늦게나마 인천시와 인천시의회도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인천시의회는 지난 4월 ‘인천시 산업재해 예방 및 노동안전보건 증진을 위한 조례’(조성혜 민주당 시의원 대표발의)를 제정했다. 5년마다 노동안전보건 기본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인천형 명예산업감독관·노동안전보건센터·노동안전보건자문위원회 운영 등을 담고 있다. 인천시는 최근 산재예방팀을 신설해 노동안전보건 관련 세부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조 시의원은 “안전보건 관리·감독은 중앙정부(고용노동부) 권한이지만 지방정부도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영세한 사업장 관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며 “산재 은폐 사업장은 예산 지원을 중단·회수하거나 사업장 허가·신고를 취소하는 등의 강력한 벌칙 조항은 조례에 담기 어렵겠지만, 노동 현장 실태조사 등을 통해 지속해서 관리해 나가면 산재사고는 점차 감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정하 기자 jungha98@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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