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료를 덜어내도 괜찮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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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언론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연예면 기사를 자극적으로 변형해 올리는 일이었다.
"제목이나 사례가 자극적이고 입장이 선명해야 많이 읽히잖아요. 요즘 논의에는 O 아니면 X만 있는 것 같아요. 그 사이의 쟁점을 고려하면 입장이 없다고 여겨지죠." 연재 노동자 엘은 글을 공유한 뒤에 장사 잘했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톨렌티노는 자극적일수록 주목받는 인터넷이라는 시스템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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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릭 미러: 우리가 보기로 한 것과 보지 않기로 한 것들
지아 톨렌티노 지음, 노지양 옮김/생각의 힘(2021)
온라인 언론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내가 맡은 업무는 연예면 기사를 자극적으로 변형해 올리는 일이었다. ‘홍승은이 샐러드를 먹었다’는 제목은 ‘홍승은 몸매의 비결은?’으로, 본문의 ‘샐러드를 먹었습니다’는 ‘샐러드를 선택했습니다’로 서술어만 바꿔 공유하면 됐다. 당시 나는 스무 살이었고 글을 쓴 적도 없었지만, 클릭을 유도하는 제목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두 달도 채우지 않고 그만둔 그 일이 자꾸 떠오르는 건, 글을 쓸 때마다 내 글이 그때와 얼마나 다른지 고민되기 때문이다. ‘쓰다’라는 동사가 완성되려면 ‘읽히다’가 필요한데, 어떻게 하면 많이 읽힐지 고민하다 보면 조미료 쪽으로 손이 간다. “제목이나 사례가 자극적이고 입장이 선명해야 많이 읽히잖아요. 요즘 논의에는 O 아니면 X만 있는 것 같아요. 그 사이의 쟁점을 고려하면 입장이 없다고 여겨지죠.” 연재 노동자 엘은 글을 공유한 뒤에 장사 잘했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나도 잘 아는 마음이었다.
<트릭 미러>의 저자 지아 톨렌티노도 그 마음을 안다고 말한다. 톨렌티노는 자극적일수록 주목받는 인터넷이라는 시스템에 주목한다. 인터넷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은 물론, 타인의 고통에도 조미료를 뿌려 과잉되게 표현하는 법을 학습한다. 그 세계에서는 발언과 행동이 혼동되고,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게 된다. ‘건강하고 생산적이고 자유롭고 아름다운 여성’이 21세기 페미니즘의 모델로 소비되고, 무엇이 페미니즘인지 O 아니면 X로 간편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고통받는 타자의 모습을 공유하는 일로 충분히 연대했다고 느끼며, 누군가 말실수해서 미끄러지길 기다리는 일을 중요한 실천으로 삼는다. 인터넷을 지배하는 인터넷 밖 거대 자본의 알고리즘에 따라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현실이 왜곡되는 모습을 톨렌티노는 굴절된 거울, ‘트릭 미러’라고 소개한다.
선망이 있으면 소외도 있다. 나는 에스엔에스(SNS)에 연결된 관계망에서 자주 소외감과 피로감을 느껴서 거리를 두는 편이지만, 아예 끊지는 못하고 있다. 많은 프리랜서와 직장인, 활동가들이 에스엔에스의 기쁨과 슬픔을 말한다. 온라인의 입지가 오프라인의 기회와 밀접하게 연결된 지금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망과 소외와 굴절의 세계. 거울 세계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쓰고, 읽고, 연대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 윤리적 태도는 어떻게 가능할까. 휴대전화의 전원을 끄고 산책하러 나가면 모든 게 해결될까? 톨렌티노는 하루 중 아마존에 접속하는 시간을 줄이는 등 다양한 개인적 실천을 시도하지만, 낙관적인 해답을 주진 않는다. 다만 모두에게 말한다. “자신의 실제 자아가 비난받을 점이 많고 일관성 없으며 중요하지 않은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그 자아에 따라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무엇을 얻고 있는지를 신중하게 돌아보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정체성에 대해서는 덜 신경 쓰고, 참을 수 없는 주장이란 것에 깊이 회의할 줄 알며, 나 자신부터 내세우지 않고는 연대감을 표현할 수 없을 때 부끄러워해야 한다.”
조미료가 없어도 진실을 말할 수 있으며, 그런 이야기를 읽어줄 사람이 있다는 믿음으로 그는 글을 쓴다. 그 믿음을 믿고 싶어서 나는 책을 따라 혼란을 걸었다.
홍승은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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