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척스런 해녀도 여자, 일흔에 찾아온 '빛나는 순간' [Weekend 문화]

신진아 2021. 6. 25.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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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딸 고두심, 멜로영화 주인공으로..
"슬픈 역사 위로하고 싶었다"
33살 차이 배우 지현우와 호흡
세대 뛰어넘는 사랑에 슬픈정서 녹여
해녀 역할 소화하려 물 공포증 이겨내고
할머니들이 쓰는 푸짐한 사투리 배우기도
제주 4·3사건 아픔 담은 장면에선
10분 넘게 끊지않고 진심 쏟아내
올해 일흔살인 국민배우 고두심이 70대 해녀와 30대 다큐 PD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새 영화 '빛나는 순간'에서 멜로 연기를 펼친다. 명필름 제공
'빛나는 순간' 스틸 컷 ⓒ 뉴스1 /사진=뉴스1
배우 경력 50년. 그중 22년을 농촌드라마 '전원일기'의 맏며느리로 살다 이후 '국민엄마'로 불리며 방송 3사 연기대상을 모두 휩쓴 고두심. 어느덧 70세가 된 여배우에게 젊은 시절엔 미처 누리지 못한 빛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이 돼 자신의 고향, 제주도에서 마음껏 방언을 하며 영화를 찍은 것. 고두심·지현우 주연의 '빛나는 순간'(감독 소준문)은 70대 해녀와 30대 다큐멘터리 PD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담았다. '코르셋' '바람난 가족'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카트' '아이 캔 스피크' 등 다양한 상업영화와 함께 주목할 여성영화를 선보여온 명필름의 42번째 작품이다. 고두심은 "이 나이에 멜로 주인공이 될지 상상도 못했다"며 웃었다.

■"해녀야말로 제주도의 혼이자 살아있는 정신"

제주도의 푸른 바다와 해녀들의 쾌활한 웃음소리로 시작을 여는 '빛나는 순간'은 마치 아름답지만 슬픈 역사를 지닌 제주도와 똑 닮았다. 해녀들의 강인한 삶은 반짝반짝 빛을 내며 스크린에 윤기를 더하고, 세대를 뛰어넘는 두 남녀의 사랑은 그 어떤 아픔도 가만히 품어주는 바다처럼 뭉클한 위로의 순간을 전한다. 그 중심에는 제주의 딸, 고두심이 있다.

고두심은 "고두심의 얼굴이 곧 제주의 풍광이라는 (소준문 감독의) 말에 완전 넘어갔다"며 "특히 해녀의 내면을 다룬다는 점에서 제주도 출신인 내가 적역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제주 해녀하면 마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신격화하기도 하는데 해녀 역시 인간이고 여자다. 그들의 정신이 제주의 정신이고 혼"이라고 부연했다. MBC 일일사극 '정화'에서 제주 출신의 조선 후기 자선 사업가 김만덕을 연기한 바 있어 그를 알리는데도 앞장서고 있는 고두심은 "해녀들의 삶과 업적도 널리 알리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이번 작품에서 해녀로 출연해야 했던 고두심은 물에 대한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 "중학교 때 파도에 휩쓸려 죽을 뻔한 적이 있어요. 근데 해녀가 수영을 못하면 말이 안 되잖아. 촬영 전 수영 연습을 아주 많이 했는데 다행히 고향 바다라 덜 무서웠어요. 혹시 내가 쓸려가더라도 (극중 동료 해녀들이) 날 살려줄 것이라 믿었죠." 소 감독은 "선생님의 몸이 바위에 부딪힐 정도로 파도가 아주 거세져 적당한 선에서 촬영을 접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고 촬영 비화를 전했다. "그때 선생님이 내 얼굴을 살피더니, 감독님 만족할 때까지 찍어라, 포기하지 말라고 하셨다. (두 남녀 주인공이 애틋한 시간을 보내는) 곶자왈 숲 장면을 찍었을 때, 선생님이 동백충에 물려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 2주나 고생했는데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며 고마워했다.

■"제주 4·3사건 아픔, 조금이나마 위로하고 싶었다"

"내 얼굴이 싫어, 미워, 울 부모가 나 아니었음(안 죽었어), 그날에, 그 봄에, 엄청 잔인했지." "살다보면 살아진다, 우리 해녀들은 가슴 속에 늘 그 말을 품고 살아. 그 한마디면 모든 걸 견딜 수 있으니까." 극중 진옥(고두심)이 경훈(지현우)의 카메라 앞에서 하는 말들이다. 특히 "왜 다큐멘터리 찍기 싫었냐"는 경훈의 물음에 "내 얼굴이 밉다"면서 들려주는 진옥의 말에는 제주도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두심은 "내가 태어나기 3년 전에 제주 4·3사건이 일어났지만 부모님과 친척 어르신들을 통해 하도 많이 들어, 내가 직접 겪은 일처럼 느끼며 살아왔다"고 돌이켰다. "친척집 제사에 가면 온 동네가 눈물바다였다. 싹 몰살당한 까닭이다." 원신 원컷으로 찍은 이 장면은 소 감독이 쓴 대사에 고두심이 즉석에서 쏟아낸 말로 완성됐다. 소 감독은 "촬영 당일 선생님이 이 장면은 그냥 자신을 믿어달라고 하셨다"며 "10분 넘게 끊지않고 단 한 번에 찍었다"고 그날의 촬영을 떠올렸다. 고두심은 "마치 신 내린 것처럼, 말이 술술 나왔다. 나도 놀라고 스태프들도 놀랐는데, 개중에 흐느끼는 사람이 있어서 표현이 잘 됐구나 생각했다"며 그 장면에 담은 자신의 진심을 전했다.

제주도의 정신을 잘 담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고두심에게 이번 영화는 "힐링 그 자체"였다. 고두심은 "(영화 찍는) 두 달 간 정말 행복했다"며 "19살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상경 후 지금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제주도 사투리를 간혹 쓰지만 이렇게 푸짐하게 써본 건 처음이다. 어차피 (방언에) 자막을 넣으니까, 할머니들이 쓰는 언어도 습득해 더 많이 사용했다(웃음)"며 즐거워했다.

젊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설정에 대해선 "흔하진 않지만 어떤 계기가 생기면 못할 사랑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고두심은 "사랑은 위로의 순간에 피어난다는 감독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나이 든 여자도 억척스런 해녀도 여자"라고 부연했다. 극중 두 남녀는 바다를 매개로 연결돼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깊은 상처를 서서히 치유한다. 그 과정은 일상에 녹아 아름답게 펼쳐진다.

특히 둘의 스킨십이 표현된 숲속 동굴 장면은 제주 4·3사건의 아픔과 겹쳐지며 단순히 멜로 신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소 감독은 "제주 도민들이 이 장면의 연출 의도를 잘 읽어주며 좋아해주셔서 감사했다"며 "또 사랑은 두 사람이 느끼는 것이지 (타인의) 이해를 받아야 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의견을 전했다.

이어 그는 "다양한 형태의 사랑이 존재한다"며 "세대간 갈등과 미움이 난무하는 시대에 제주 4·3사건을 겪은 이전 세대와 최근 몇 년간 각종 재난과 사고를 당한 젊은 세대가 서로의 아픔을 보듬고 위로해주길 바란다"고 부연했다. 12세 관람가. 30일 개봉.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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