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관사서 연트럴파크까지… ‘길에서 길어올린 가르침’ 나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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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반짝이는 별빛이 부딪히고/아래로는 넓은 평야의 풍성함을 굽어 보네(上磨明星熒 下瞰周原).’
성삼문(1418~1456)은 집현전 학사 시절 세종에게 사가독서(賜家讀書·유급 독서 휴가)를 받아 진관사에 머물며 이런 시를 남겼다. 조선시대의 ‘템플스테이’였던 셈. 580년 후에 진관사를 방문한 원철 스님은 ‘성삼문이 시를 지은 자리가 어디일까’ 절 안팎을 서성인다.
불교계 글쟁이로 유명한 원철 스님이 신간 ‘낡아가며 새로워지는 것들에 대하여’(불광출판사)를 펴냈다. 본지에 연재 중인 에세이 ‘동어서화(東語西話)’ 등 인문학적 답사기를 모았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법전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해인사 승가대학장을 지내는 등 경전과 고전에 해박한 학승(學僧)으로 유명하다.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장 등 보직을 맡는 바람에 서울 생활 10년이 훌쩍 넘게 되자 그는 거리에서도 ‘공부의 길’을 찾은 듯하다. 틈나는 대로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때론 직접 운전해서 찾아간 곳에서 ‘현장 학습’을 한다.
책엔 60곳과 옛사람 100명에 얽힌 이야기가 실렸다. 그가 찾은 장소와 사람은 널리 알려진 명소도 아니고 누구나 아는 유명 인사도 아닌 경우가 태반. 그렇지만 스님이 ‘길에서 길어올린 글’을 따라가면 스토리를 만나게 되고 인생의 가르침을 얻게 된다.
그는 태풍 지난 후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 듣기 위해 인왕산 밑 수성동을 찾아가 추사와 겸재의 옛 글을 떠올린다. 경기도 이천에선 돌고 도는 나무의 운명을 생각한다. 관아를 뜯은 재목 일부가 향교 건축에 쓰였다가, 향교가 허물어지며 다시 일부는 영월암이라는 암자 보수에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다. 강원 삼척에선 고종이 조선 말에 조성한 옛 조상 무덤 준경묘와 영경묘를 찾아 술 대신 커피를 올리고 음복(飮福)하기도 한다. 무너져가는 조선 왕실을 풍수를 이용해 되살려보려 썼던 묫자리다. 안동 도산서원에선 서원을 짓기 위해 기와 굽고 나무 다듬었던 스님들의 기록도 살핀다. 해남 일지암에선 초당과 기와집 사이에 놓인 작은 연못을 보며 ‘적당한 거리가 주는 긴장의 맛’을 깨닫는다. 조계사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냥 지나치는 대웅전 옆 백송(白松)까지 옛 기록을 꼼꼼히 뒤져 그 가치를 일깨워준다. ‘연트럴파크’로 불리는 옛 경의선 숲길에선 ‘길의 생로병사’를 생각한다.
스님은 서문에서 “오래된 것들에 축적되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수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그 이야기는 다시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진다”고 적었다. 책에는 답사 현장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직접 찾아가 축적된 시간과 이야기를 만나보라’는 권유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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