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 걷기, 퀴즈 풀기, 물 마시기로 푼돈벌이.. "작지만 달달한 행복"
정부 중앙부처에 근무하는 30대 공무원 K씨는 지난해 봄부터 하루 1만보 이상을 걷기로 결심했다. 엘리베이터는 타지 않고 버스 정류장은 하나 먼저 내리며, 퇴근 후 집 안을 돌아다니기도 한다. ‘만보 걷기’의 목적은 건강관리 외에도 또 있다. 100보에 1포인트씩, 1만보를 걸으면 100포인트를 주는 앱 서비스를 이용해 돈을 모으는 것이다. 이 앱을 설치한 스마트폰을 갖고 다니면 걸음 수에 맞춰 포인트를 준다. K씨는 “코인으로 얼마를 벌었느니, 주식으로 대박이 났느니 하지만, 나는 건강도 챙기고 용돈도 버는 이런 식의 푼돈 모으기가 더 좋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K씨가 지난 1년간 번 돈은 2만1000원 정도. 그는 “남들 보기엔 ‘그게 돈이냐’고 하겠지만 1년 넘게 꾸준히 만보 걷기를 실천할 수 있었던 데는 1000원, 2000원씩 모으는 재미가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돈이 돈을 부르는 ‘돈 복사’가 재테크의 대세가 된 시대에도 여전히 ‘티끌 모아 태산’을 외치는 이른바 ‘티끌족’이 있다. 주식이나 가상 화폐 투자에 자신이 없거나 자금이 넉넉지 않아서, 혹은 과거 투자에 뛰어들었다가 상처만 입고 물러선 경우 등 다양한 이유로 손실 가능성이 없는 만큼 수익도 미미한 ‘제로 리스크, 수퍼 로 리턴(zero risk, super low return)’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만보 걷기처럼 특정 목적(미션)을 이루면 소액을 얻는 ‘보상’ 앱부터 자투리 시간 부업에 이르기까지 상대적 액수는 적어도 성취감 하나는 확실하다.
◇직장인 10명 중 4명이 ‘앱테크'
티끌족에게 만보 걷기와 같은 ‘앱테크’는 ‘성지순례(어떤 분야에 입문하려면 꼭 해야 하는 일)’ 취급을 받는다. 애플리케이션의 ‘앱’에 재테크의 ‘테크’를 붙인 말로, 스마트폰 앱으로 미션을 완수하면 수십~수백원의 보상을 준다. 업체는 앱 화면 속 광고로 수익을 얻어 이를 이용자와 나눠 갖는다.
의외로 이 앱테크를 하는 사람이 많다. 직장인 10명 중 4명에 이른다. 시장 조사업체 엠브레인이 지난 4월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현재 하고 있는 재테크(중복 응답)”를 조사해보니 앱테크(39.2%)가 예·적금 가입(77.8%), 주식 투자(59.8%)에 이어 셋째였다. 펀드·ETF(25.9%), 부동산(18.8%), 가상 화폐(18.5%)보다 순위가 높았다. 퀴즈 풀기, 물 마시기, 소셜 미디어 좋아요 누르기 등 앱테크의 종류와 미션도 다양해지고 있다. 경기도의 한 대기업 연구원 김모(33)씨는 설문 조사 앱테크로 하루에 100원 안팎을 모으는 경우다. 그는 “밥 먹는 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에 틈틈이 하고 있다”면서 “한 달에 치킨 한 마리 먹을 수 있는 정도를 번다”고 했다.
금융회사 앱에 있는 ‘출석 체크’ 기능도 별 노력 없이 접속할 때마다 수원 상당의 포인트를 받을 수 있어 티끌족에겐 필수 코스로 꼽힌다. 유튜브에선 ‘앱테크로 한 달 50만원 벌기 도전’ 같은 콘텐츠도 유행하고 있다. 앱을 이용한 건 아니지만, 지난 5월 네이버가 진행했던 ‘블로그 일기 쓰기’ 이벤트에 3일 만에 100만명이 몰렸던 사례도 소액 벌이의 인기를 방증한다. 2주간 일기를 쓰면 1만6000원을 받을 수 있는 행사였는데, 의미 없는 글을 복사 붙여 넣기 하는 등의 부정행위까지 나타날 정도로 과열돼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퇴근 후 음식 배달·쇼핑몰 운영도
아예 부업 전선에 뛰어들기도 한다. 잡코리아가 지난 4월 2100여명을 대상으로 설문해 보니 취업자(아르바이트생 포함) 열 명 중 네 명 이상(47.4%)이 부업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추가 수입을 얻기 위해서’라고 답한 사람이 65.9%로, 여가 활용(20.4%)이나 취미(12.3%) 때문이라고 답한 사람보다 훨씬 많았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한 배달 아르바이트가 대세다. 배달의민족이 운영하는 배민 커넥트가 대표적으로, 이용자가 2019년 12월 1만명에서 작년 말 5만명으로 1년 만에 5배가 됐다. 대부분이 직장인이나 주부다. 배달 아르바이트 수입은 업체와 시간대, 거리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건당 3000원 안팎이다. 하루 1만~2만원을 버는 경우가 가장 많다. “큰돈은 아니지만, 용돈 정도는 된다”고 한다.
온라인 쇼핑몰 같은 좀 더 본격적인 부업도 있다. 서울의 한 에너지 기업에 근무하는 30대 사원 P씨는 온라인 구매 대행숍을 운영해 월 20만원 안팎을 번다. 그는 “얼마 전 주식으로 적지 않은 돈을 날려 일을 시작했다”며 “(부업을 금지하는) 회사에는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관두기 어렵다”고 말했다.
티끌족은 대부분 30~40대의 젊은 직장인이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재테크 광풍 속에서 ‘나만 돈을 못 버는 게 아닌가’ 같은 불안감이나 스트레스를 그들 나름대로 안전·건전하게 해소하는 것”이라며 “누가 뭐라든 자기 방식으로 성취감과 자기만족감을 느끼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할 만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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