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 2040] ‘허슬러’였던 이 남자가 지킨 약속

최보윤 문화부 차장 2021. 6. 25.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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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뉴욕서 경험한 스타트업
“선장 훌륭하고 비전 확고해도 인재들 떠나면 배는 표류해”
행복한 워커홀릭 귀하게 여겨
매출 4조 유니콘 기업 낳았다

“여기 휴게실은 없어요? 점심시간 같은 때에 잠깐 낮잠은 안 자요?”

‘스타트업’ 하면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코쿤(cocoon·누에고치)식 의자에서 개인 작업을 하다 피곤하면 잠이 들고, 캔틴(canteen·매점)에서 진한 커피를 내려 마시며 동료들과 화기애애 회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회사 흰 벽을 잔뜩 장식한 포스트잇 속 의견을 보며 ‘이런 걸 고치면 되겠군’ 하고 토론하는 등 자유롭고 여유가 넘치는 공간…. 하지만, 눈을 떠 보니, 전.쟁.이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일러스트=양진경

5년 전인 2016년 봄. 미국 뉴욕 연수 기간 학교에 낼 ‘체험 리포트’를 작성하기 위해 3개월 정도 인턴 아닌 인턴 기회를 잡았다. 요즘 화제인 스타트업 ‘눔(Noom)’이었다. 얼마 전 6000억원 투자를 유치하며 미 나스닥(NASDAQ)이 뉴욕 한복판에 전광판 광고까지 걸어준 글로벌 헬스케어 유니콘 기업이다. 한국인 정세주 대표가 뉴욕에서 2008년 창업한 회사로 당시만 해도 수십 명 정도 규모였다.

‘다이어트 코치’ 앱이었지만, 헬스케어 전문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당시 미국 보험사와 모바일 헬스케어 업계 동향, 행동경제학 연구까지 다양한 분야를 포섭했다. 모바일 최적화는 기본, AI 코치 등을 비롯해 유료화 서비스에 대한 연구도 한창이었다. 이들은 쉬지 않았다. 컴퓨터를 여니 색색 미팅 일정표가 떴다. 배정된 미팅룸 색상이었다. 하루 9시간 정도 근무에 자율 출퇴근. 집값 때문에 기차 타고 1시간 거리에 산다는 이는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칼’퇴근했다. “너희는 왜 안 쉬어?”라는 얘기에 “왜 쉬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일이 밀려 집에서 하면 안 되잖아. 오후엔 가족이랑 함께 보내야지.”

밥 먹는 시간도 일의 연장이었다. 솜씨 좋은 요리사를 영입해 매일 거하게 뷔페식 건강 상차림을 올렸다. 브로콜리 볶음, 토마토 페타 치즈 샐러드, 국수가 들어간 허브 수프, 튀긴 생선, 닭 가슴살 스테이크, 비트·아스파라거스·고구마 모음, 와플에 메이플시럽…. 보기만 해도 몸이 좋아질 것 같은, 하지만 의외로 맛도 좋은 음식들이다. 샐러드 볼 같은 데에 음식을 담은 직원들은 밥을 먹는 동안 일은 물론 식단까지 토론했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 같은 나를 향해 눔 공동 창업자 아텀 페타코프가 묻는다. “네가 회사에서 얻고 싶어 하는 가치가 뭐니. 여기선 사람들이 회사를 떠나지 않게 서포트해주는 게 풍토야. 인재들이 떠나면 회사엔 무능력한 이들만 남게 되잖아. 선장이 아무리 훌륭하고 비전이 확고해도 그 가치를 알아봐 줄 이들이 없다면 배는 어느새 표류하겠지.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테고.” 피부색도, 국적도 다르고, 장애인도 여럿이었지만 이들에겐 ‘유니콘이 되겠다'는 공동 열망이 있었다.

주로 타자 소리만 들리던 회사에서 항상 목소리 높여 웃던 이는 ‘공동 선장’ 정세주 대표였다. 스스로를 ‘허슬러’(사기꾼이란 뜻이지만 스타트업 업계에선 ‘일과 말을 조합해 이뤄내는 이’를 뜻함)라 부르며 “매일 하이(들떠있다)하다”고 사람들을 환대하던 그는 직원들 없는 곳에서 간혹 한숨을 내쉬곤 했다. 월급 날이었다. 가족을 위해 ‘행복한 워커홀릭’이 돼 있는 직원을 위해” 그는 어떻게 해서든 회사를 지켜내겠다 했다. 서너 시간 잠을 줄여 일했고, 자존심 굽혀가며 지인에게 돈을 빌리기도 했다. 신용은 생명이었고 회사는 직원과 한 약속이었다. 기업 가치 4조원에, 직원 2000명에 이르는 기업으로 성장한 배경엔 직원의 마음을 지켜낸 이 남자의 지독한 치열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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