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소방관의 트라우마, 망각은 치유가 될 수 없다

신열우|소방청장 2021. 6. 2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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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지난 현충일, 천안 중앙소방학교에서 순직 소방인 9인의 위패 봉안행사가 있었다. 유가족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방충혼탑에 9인의 이름이 새겨졌다. 2002년 5월 이후 봉안된 위패만 394위에 달한다. 소방인들의 값진 희생은 세상을 비추는 별이 되지만 유가족과 동료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다. 지난 19일 쿠팡 덕평 물류센터 화재 현장에서 인명구조에 나섰던 경기도 광주소방서 김동식 구조대장이 끝내 순직해 6만 소방관의 가슴에 또다시 깊은 상흔이 더해졌다.

신열우|소방청장

한 분 한 분 소중하지 않은 희생이 없다. 특히 정희국 소방위를 생각하면 가슴이 시리다. 2016년 10월 태풍 ‘차바’가 울산을 덮쳤을 때 정희국 소방위는 ‘고립된 차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신고를 받고 후배 강기봉 대원과 함께 인명구조에 나섰다. 하지만 범람한 강물에 전봇대를 붙들고 버티다 결국 둘은 급류에 휩쓸렸다. 정희국 소방위는 2.4㎞를 떠내려가다 가까스로 물살에서 벗어났지만, 강기봉 대원은 끝내 주검으로 발견됐다.

늘 함께했던 후배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렸던 정 소방위는 끝내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2019년 8월 생을 달리했다. 정 소방위의 캐비닛에서 유품을 정리하던 중 동료들은 강기봉 대원의 근무복을 발견했다. 주변에 털어놓지 못하고 후배의 근무복을 부여잡고 살아온 그의 고통과 고뇌를 마주하고 동료들은 오열했다.

정 소방위의 죽음은 트라우마를 겪다 숨진 소방관들의 순직 인정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시켰다. 인사혁신처도 지난해 5월 정 소방위에 대해 처음으로 ‘위험직무순직’을 인정하고, 그해 11월 국가보훈처는 국가유공자로 등록했다.

대부분의 소방관은 한 해 두 해 현장경험을 쌓고, 크고 작은 위험에 맞닥뜨리면서 하나 둘 노하우를 쌓아 베테랑으로 성장한다. 그 과정 속엔 일반인들은 미처 알지 못하는 소방관들만의 아픈 기억들이 있다. ‘내가 더 잘했더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자책감은 현장을 떠나도,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다. 세월이 흘러도 망자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불현듯 튀어나온다.

지난해 소방관들의 특수건강검진 통계를 보면 10명 중 7명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나왔다. 눈여겨볼 대목은 PTSD로 고통받는 직원들이 많다는 것이다. 늦은 감은 없지 않지만, 국립소방병원이 2024년 완공을 목표로 건립되고 있다. 21개 진료과목에 300병상 규모로 소방관의 건강 이력과 지표를 종합관리한다. 특히 PTSD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시설과 프로그램을 도입하게 된다.

병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기억과 존중이다. 흔히들 트라우마는 망각으로 치유하려고 한다. 사회도 잊고, 스스로도 잊도록 강요한다. 아마 정희국 소방위도 그러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답이 아니다. 소방관이든 군인이든 경찰이든 그들의 값진 희생과 가족, 동료들의 상처는 사회의 존중과 기억을 통해서만 빛을 발하고, 치유된다는 점을 추모의 달을 맞아 새삼 강조해본다.

신열우|소방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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