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세상]주방 오물분쇄기

고금숙|플라스틱프리 활동가 2021. 6. 25.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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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나는 여름을 사랑한다. 365일 여름인 동남아시아와 여름 과일인 수박도 사랑한다. 그런 까닭에 우리 집에는 수박 껍질이 캄브리아기 지층의 화석처럼 쌓여가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여름 다들 음식물 쓰레기는 어떻고 처리하고 있나요?

고금숙|플라스틱프리 활동가

음식물 쓰레기는, 한 줄도 못 썼는데 마감이 닥친 원고처럼 치워버리고 싶은 존재다. 냄새가 나고 수분이 생기고 벌레가 꼬이고 무겁다. 생분해 비닐, 냄새 차단 용기 등이 나왔지만 영 마뜩잖다. 인공지능과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는 시대에 이게 최선이란 말입니까라고 묻고 싶다. 그러다 음식물 쓰레기를 싱크대에 넣기만 하면 된다는 기특한 물건을 접했다. 아파트를 분양받은 지인 역시 입주민들이 대동단결해 이 물건, 바로 오물분쇄기를 신청했단다.

오물분쇄기의 경우 분쇄된 음식물 찌꺼기의 80% 이상을 회수해야 한다. 물론 아파트 입주 설명회에서 환경부 인증을 받은 친환경 오물분쇄기는 찌꺼기를 갈아 하수도에 배출하도록 불법 개조된 제품이었다. 누가 싱크대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잘게 다져진 음식물 쓰레기를 퍼내려고 80만원을 쓰겠는가. 하수도로 음식물 쓰레기를 배출할 경우 판매업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을, 사용한 소비자는 1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내야 한다. 하수도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법 개조된 분쇄기가 설치된 가정에 무단 침입해 증거를 잡지 않는 한 적발할 방법은 없다. 도살장에 몰래 잠입해 현장을 폭로하고 잡혀가는 동물권 활동가 정도의 각오가 서야 한다.

그러나 음식물 쓰레기를 갈아버리는 일은 지구를 갈아버리는 일이자, 공동주택 하수도를 막히게 해 분쟁을 일으키는 일이자, 세금을 더 내게 하는 일이다. 너나없이 음식물 쓰레기를 하수도로 배출하면 오염부하가 27% 증가하고 하수처리장 증설 등에 12조2000억원의 비용이 든다. 이런 까닭에 주방용 오물분쇄기는 1995년 하수도법에서 금지되었다가 2012년 음식물 쓰레기를 다시 회수하는 인증제품에 한해 허용되었다. 2020년 말까지 오물분쇄기 누적 판매량은 18만여개로, 이 중 5만대 이상이 불법으로 개조된 제품이었다. 다행히도 지난달 주방용 오물분쇄기를 금지하는 법안이 제안됐고, 이 개정안에 대한 시민 의견을 묻는 국회 입법예고 홈페이지가 열렸다. 하지만 본인 인증과 로그인을 요구하는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이해관계가 확실한 판매업자들만 의견을 달았다. 나도 비밀번호 찾느라 10분 걸렸다. 그 결과 절대다수가 금지안을 반대하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이 소문을 들은 전국의 ‘쓰레기 덕후’들이 궐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해관계는 돈이 아니라 지구의 건강과 지속 가능성이다. 이들이 궐기하자마자 오물분쇄기를 금지하는 법안에 찬성하는 의견이 반대 의견을 덮어버린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가치를 자기 일처럼 여기는 사람들, 개인의 실천과 참여를 통해 사회적 물결을 바꾸는 사람들. 그리하여 일상에서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김질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가. 쓰레기 덕후들은 라이프스타일로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

고금숙|플라스틱프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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