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칼럼] 열린 능력주의가 옳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2021. 6. 2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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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16일 국회 대표실에서 조선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이덕훈 기자

능력주의 논란이 거세다. 이준석 현상이 중간 기폭제가 됐다.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이하 이준석)는 공정한 경쟁이 좋은 사회를 만든다며 청년 할당제와 여성 할당제를 비판한다. 36살 청년 이준석은 자신의 능력으로 제1야당 대표 자리를 쟁취했다고 자부한다. 반면에 능력주의의 해악을 비난하는 사회적 목소리도 크다. 능력주의는 말만 번지르르하지 실제로는 약육강식과 승자 독식의 논리라는 주장이다. 신자유주의적 착취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능력주의가 승자의 우월감과 패자의 죄책감을 부추겨 새로운 계급사회를 정당화한다는 비난도 제기된다.

능력주의(Meritocracy·실력주의)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닦은 능력과 업적에 따라 보상받는 사회를 지향한다. 신분이나 연줄 대신 자유로운 개인의 노력을 중시하는 자유경쟁 시대에 직관적 호소력이 크다. 하지만 능력주의 담론의 기원은 자본주의보다 훨씬 오래됐다.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Suum Cuique)이라는 명제가 기원전 700년경 호머의 서사시 ‘오딧세이’에 처음 등장한 것이 단적인 증거다. 능력주의가 시대를 넘어선 보편적 소구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주라’는 명제를 보편적 분배 정의론으로 발전시켰다. ‘동등한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받는 것이 정의이며, 동등하지 못한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받을 때 불평과 불만이 싹튼다’는 그의 통찰이 예리하다. 봉건적 계급 차별과 포퓰리즘적 평등주의를 두루 극복한 빼어난 능력주의 정의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능력주의 담론에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준석은 자신의 중학 시절이 ‘완벽한 공정 경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학생의 실력과 지능도 가정 환경이라는 우연적 운(運)의 영향을 받는다는 교훈을 간과한다.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는 운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대학의 지역 인재 균형 선발이 정당화되는 이유다. 공정 경쟁의 형식만을 중시하는 이준석의 ‘닫힌 능력주의’는 평등한 기회와 공정 경쟁을 토대로 정의를 추구하는 ‘열린 능력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나아가 열린 능력주의는 롤스(J Rawls·1921~2002)의 통찰처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차등(差等) 원리(Difference Principle)’를 수용해야 한다. 인권 선진국에서 약자 우대 정책을 강력히 시행해 온 데는 철학적·현실적인 이유가 엄존한다. 이준석의 비판과는 달리 여성할당제·청년할당제는 정당한 차등 원리의 구체적 사례들이다.

하지만 “이준석은 한국의 트럼프다”라고 매도하는 진보 진영의 공세는 정치적 선동의 성격이 짙다. 이준석과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하 트럼프)은 능력주의를 앞세우는 점에서 닮아 보인다. 트럼프가 온갖 차별적 언사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원칙을 무너트린 것처럼 이준석도 한국판 정치적 올바름의 산물인 각종 할당제와 급진 페미니즘을 비판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엔 명백한 차이가 있다. 트럼프는 막말과 거짓말로 정치적 책임 윤리를 파괴하고 적대와 차별의 정치를 일삼는 반동 정치인이다. 이와 달리 이준석은 청신(淸新)한 젊음의 언어로 바른 정치를 설파하고 공정 경쟁과 공존의 미래를 지향한다고 자임한다.

한국 사회에서 능력주의 담론이 주목받게 된 맥락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한마디로 이준석의 능력주의는 문재인 정권의 불공정에 대한 반작용이다. 조국 사태나 LH 사태에 절망한 시민들은 능력주의를 문 정권이 퍼트린 특권 세습 사회와 도둑 정치(Kleptocracy)의 대안으로 여긴다. 자신의 노력만으론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격차 사회에 분노하는 20대 청년들은 공정 경쟁의 규칙이라도 지켜지기를 갈망한다. 능력주의는 문 정권의 부족주의적 네포티즘(Nepotism·정실 인사)에 저항하는 강력한 비판 담론으로 승격되었다. 이준석의 능력주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문 정권이다.

공정 경쟁의 형식만 강조하면 ‘가진 자’에게 유리한 닫힌 능력주의로 퇴행한다. 기회 평등과 공정 경쟁의 결과를 인정함과 동시에 패자 부활전을 도입하고 약자를 존중해야 열린 능력주의가 탄생한다. 진정한 능력주의는 문재인 정권이 망쳐버린 한국 사회의 기강과 가치 규범을 되살릴 최강의 치료제다. 공정을 열망하는 오늘의 시대정신이 열린 능력주의를 부른다. 약자를 살리고 패자와 동행하는 성숙한 능력주의야말로 정의롭고도 옳다. 열린 능력주의만이 대한민국을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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