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雜事] 6.먹고 버린 소뼈가 성균관에 산을 이룬 이유에 대하여
조선은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해 실용적으로 사용한 나라였고, 역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해 서적을 대량으로 인쇄한 국가였다. 그 조선에서 자기가 만든 과학기술 사용법을 다 까먹어버리는 참극이 벌어졌다. 성리학 프레임에 매몰된 조선 학자들은 성리학 이외 일체 학문을 그저 성인들이 ‘권계하던 기구’로 쓰고 치워버렸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작심하고 풀어보는 한일악연 500년사⑤ 먹고 버린 소뼈가 성균관에 산을 이룬 이유에 대하여
◇소 잡기를 일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살우위사(殺牛爲事‧소 잡기를 일삼다)’라는 문장이 두 번 나온다. 한번은 성종 때 소 잡기를 업으로 하는 백정을 설명할 때, 한번은 중종 때다. 백정은 소 잡는 게 일이니 당연한 표현이다. 하지만 중종 때 소 잡기 일삼은 이야기는 조금 충격적이다.
‘사학四學 관원들이 교회하는 데 뜻이 없어 유생이 모이지 않아 학사가 늘 비기 때문에, 노비들이 소 잡기를 일삼아[殺牛爲事‧살우위사] 뼈가 구릉처럼 쌓였나이다.
‘사학’은 조선 건국 후 한성에 만든 4개 중등학교다. 상급 교육기관은 성균관이다.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그런데 학교 선생들은 가르칠 뜻이 없고 학생이 없다 보니 학교에서 소를 잡아먹어 소뼈가 언덕처럼 쌓였다는 충격적인 보고였다. 이미지를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어느 중학교 교실과 중첩시키면 몇 달을 신문과 방송에 도배질 당할 일이다. 이 보고가 올라온 날이 서기 1542년 1월 4일이다. 날짜를 잘 기억해두시길.
◇‘빽’이 난무한 공무원 조직
공교육이 완전히 망가진 근본 원인은 ‘정치’였다. 학문과 덕치의 상징, 성군 세종이 등극하고 10년이 지났다. 1428년 8월 대사헌 조계생이 이렇게 상소했다.
‘서로 청하고 부탁해 벼슬에 제수되면 부임하자마자 여러 핑계로 사표를 내고는 또 권세가에 부탁해 승진하기를 거듭한다. 아무도 공부를 하려 하지 않는다.’
학교 선생 또한 ‘가르치고 기를 일은 생각지도 않고 함부로 빨리 벼슬에 나아가고자 하여’ 나라 학문이 점점 쇠잔해간다고 했다. 폐해를 한참 열거한 뒤 조계생이 이렇게 건의했다.
“과거 응시자는 반드시 성균관 출석부[圓點‧원점]를 제출하게 하사이다.” 세종이 이를 안건으로 올리니 의정부 세 정승은 물론 육조판서까지 빠진 사람 없이 죄다 말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하였다.
공부고 나발이고 필요 없고 빽을 써서 공무원이 되면 그만이니, 공생 관계에 있는 장관들이 죄다 출석부 체크를 거부했다는 기록이다.
또 있었다. 1445년 7월 18일 세종은 ‘충순위忠順衛’ 부대를 창설했다. 3품 이상 고위직 아들이 입대해 복무가 끝나면 타 부서로 전직할 수 있는 부대였다. 말이 부대지, 군역을 가장한 특권이었다.
특권부대 창설 석 달 만에 ‘학생들이 책을 버리고 다투어 활 쏘고 말 타는 것을 익히는 자가 몇 천인지 알지 못하고, 성균관에 머물러 있는 자는 수십 명밖에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학업은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고 그나마 과거를 통하지 않는 출세가 횡행했으니, 어느 누가 시간과 공을 들여 학교에서 책을 읽을 것인가. 학교는 텅 비었고 교육은 쇠락했다.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1548년 ‘향교 훈도訓導들은 용렬하여 가르칠 줄을 모르며 학생들은 군역을 피하려는 무뢰한들이라 학교는 헛된 기구가 되었다.’
◇정치 투쟁과 연산군의 폭정
1456년 6월 2일,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세조에게 집현전 학자들이 반역을 꾸미다 적발됐다. 사육신 사건이다. 나흘 뒤 세조는 집현전을 폐지했다. 집현전은 고려 때부터 있었던 왕실 학문연구기관이다. 세조는 반역자들 재산을 몰수해 쿠데타 동지들에게 나눠줬다. 세조 정권은 권력의 불법성을 부국강병책으로 덮었다. 세조 본인은 불교에 심취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조선의 철학적 전통은 불교나 부국강병책과 어울리지 않았다.
세조 후임인 예종이 요절하고 성종이 뒤를 이었다. 성종에게는 세조 쿠데타 세력을 견제할 또 다른 세력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촉망받는 젊은 학자 김종직이 중앙에 진출했다. 김종직은 공신들 부패상을 틈틈이 지적질해대는 사림士林을 대표하는 인물이니, 세조 쿠데타 공신들을 견제하는 데 적합한 인사조치였다.
하지만 곧이어 닥친 연산군 시대는 암흑기였다. 1498년부터 무오·갑자·기묘사화에 성리학을 주장했던 사림세력이 집단으로 처형되거나 숙청됐다. 폭주하는 왕권을 견제한다는 명분은 왕실파에 밀렸다. 연산군은 귀에 쓴소리를 하는 신하들에게는 무자비한 지도자였다. 왕권에 항명하는 자들에게 연산군이 내린 조치는 가혹했다. 학문을 금한 것이다.
‘왕이 문신文臣을 베어 죽이고 내쫓아 거의 다 한 뒤에 독서와 교류를 법으로 금하니 사대부 집에서는 그 자손들에게 배우지 못하도록 경계하게 되었고’, ‘성균관은 활쏘기 경연장과 기생 파티장이 되었다.’ 성균관은 결국 폐지됐다. 이후 ‘왕은 종친들과 옛 성균관에서 활쏘기를 하며, 기생 풍악을 베풀어 아주 즐겁게 놀았다.’
1506년 사림세력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했다. 스스로 공신 대열에 오른 사림은 학문 진흥책을 여럿 내놨다. 연산군이 없애버린 성균관을 복원하고 사학에 경제적 지원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유명무실했다. 한번 끊긴 학문의 길은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19년 뒤 선생 없이 학생만 달랑 4명 있는 향교가 나오더니, 성균관이 도살장으로 변하는 참담한 교육현실이 닥치고야 말았다. 그래서 1542년 1월 19일 이런 일이 벌어졌다. ‘학궁(學宮‧성균관)이 텅 비어 소를 도살하는 곳으로 쓰게까지 하여 지극히 해괴하고 놀랍다.’
중등학교인 사학이 아니라 왕립대학인 성균관마저 도살장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요즘 말하는, 인문학을 경시한 출세 지향적 교육과 부패한 정치가 서로 어깨동무하고 만든 아수라장이었다.
◇1543년 백운동서원이 세워지다
그때 등장한 집단이 사림이었다. 여말선초 왕조 교체를 반대하고 초야에 묻힌 유학자 후손들이다. 연산군 때 벌어진 사화로 정계 진출이 막힌 사이 고향에서 경전을 읽은 사람들이다.
교실이 도살장으로 변한 이 어이없는 실태가 보고되고 1년 뒤 경상북도 풍기현감 주세붕이 성리학 교육기관을 만든다. 그게 백운동서원이다. 지금은 소수서원이라고 불린다.
왕들은 허물어져버린 공교육(官學‧관학) 대신 새로이 일어나는 사림의 학교, 서원을 적극 후원하게 되었다. 개판 일보 직전이었던 교육과 정치가 ‘서기 1543년’ ‘성리학을 가르치는’ ‘사립학교’ 서원이 등장한 이유였다.
배움의 터가 도살장이 됐으니, 성리학을 똑바로 가르치고 성리학 성현을 직접 모시겠다고 만든 공간이 서원이다. 그 해가 서기 1543년이다. 1543년. 그 해 3월 유럽에서는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표했고 또 바로 그해 9월에는 그 유럽에서 온 소총이 일본 다네가시마에 상륙했다.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그해 어느날 한 현감이 성리학 서원을 세운 것이다.
◇지방대를 위한 특별고시와 학문의 자유
1792년 음력 3월 25일, 경북 도산서원 옆 소나무 숲에서 특별과거시험이 벌어졌다. 소수서원 사액을 받아낸 퇴계 이황이 사거한 지 222년째 되던 날이었다. 퇴계는 1570년 12월 8일(양력 1571년 1월 3일) 죽었다. 제사는 이듬해 3월 치러졌다. 퇴계가 제자들을 기른 서당은 1573년 선조로부터 ‘도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서원이 되었다.
1792년 3월 24일, 서원에서 퇴계 제사가 치러졌다. 당시 임금인 정조가 지은 제문으로 제사를 치렀다. 다음날 백사장에서 시험이 치러졌다. 원래 서원 뜰에서 치르기로 했으나 응시자가 너무 많아 낙동강변 모래밭으로 장소를 바꿨다. 모두 7,228명이 응시했고, 제출된 답안지는 3,632장이었다. 서울로 운송된 답안지는 정조가 직접 채점했다. 정조는 이들 가운데 두 사람을 발탁해서 급제시켰다.
이날 시험은 이황의 업적을 기리는 특별시험이다. 그래서 시험 이름도 도산별과陶山別科였다. 지방에 있는 한 사립대학 설립자를 기리는 특이한 고등고시가 그 학교에서 치러진 것이다. 4년 뒤 이 특별시험을 기념하는 석비도 건립됐다. 정조가 보낸 과거 제목을 내걸었던 자리다. 당시 영의정 채제공이 쓴 비문에는 ‘지금 영남 선비들은 사학邪學에 물들지 않았으니, 참으로 어질다’라고 적혀 있다.
사학이 무엇인가.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양 학문, 서학이다. 때는 18세기 말이었다. 바야흐로 서양 학문이 조선을 물들이고 있으나 영남만은 한 사람도 오염되지 않았으니, 정조가 이게 퇴계 이황이 남긴 교화 덕분이라며 그를 제사지내고 과거를 치른다는 내용이다.
세상은 동과서가 연결되며 융합된 지식이 조선에 들어오고 있는 시대였다. 그 시대에 1000년 전 송나라 때 나왔다가 폐기된 학문 성리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기를 거부한 자들의 잔치였다. 그 비석이 있는 자리가 도산서원에서 강 건너 보이는 ‘시사단試士壇’이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뻔했던 시사단은 1974년 안동 유생들에 의해 더 높은 단을 쌓고 강변으로 옮겨졌다.
◇성리학에 갇혀버린 지식사회
서원 설립은 조선을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억압하는 지식 독재와 학문 탄압의 나라로 만든 신호탄이었다. 그런데 성리학에는 군사학도 없었고 재정학도 없었고 세무학도 없었고 외교와 경제에 대한 각론 따위도 보이지 않았다.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울 때 이미 대륙에서는 주자학을 폐기하고 실용적인 양명학이 지식사회와 관료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조선은 그 폐기된 철학을 조선 정치에 도입해 500년 동안 통치이념으로 삼은 것이다. 조선에서는 모든 조선적인 가치를 옭아매는 철학, 성리학이 깊게 뿌리를 내렸다. 코페르니쿠스와 철포와 성리학. 그 모든 것이 1543년, 그 해에 시작되었다. 왜 조선 하늘 위로 공작새가 날아갔는가, 왜 숙종 때 사람들은 경복궁에 있는 옛 기계들 사용법을 몰라 당황했는가.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여기에 있다.
다음 편 <풀 뜯던 하멜과 도쿠가와의 무역 고문 애덤스>에서 계속 /선임기자·'대한민국 징비록', ‘매국노 고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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