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雜事] 5.아무도 몰랐던 경복궁 돌덩어리들의 정체

박종인 선임기자 2021. 6. 2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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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하고 풀어보는 한일 악연 500년사④

◇세종의 신무기 시스템 구축

‘각 지방 육해군 사령관(절제사와 처치사)에게 문서 한 권을 보낸다. 무기 주조 방식과 화약 사용법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다. 군국에 관한 비밀의 그릇이다. 항상 비밀히 감추고 하급 관리 손에 맡기지 말라. 임무 교대 때는 이 문서를 직접 인수인계하라.’

집권한 지 만 30년 한 달 되는 1448년 음력 9월 13일, 조선 4대 군주 세종은 신무기 시스템 구축 완성을 선언했다. 3년 전 넷째 아들 임영대군 이구 감독 하에 진행해온 군사 프로젝트였다. 육군과 해군에 전달된 문서 이름은 총통등록銃筒謄錄이다. 화약 제조법과 화살과 탄환을 쏘는 화약무기 제작법을 담은 기밀문서다.

등극 14년째인 1432년 한 번에 화살 두 개를 쏘는 쌍전화포雙箭火砲를 시작으로 세종은 꾸준히 무기 개량 작업을 벌여왔다. 이미 그 3년 전에도 개량된 무기들은 소비되는 화약 양은 동일하고 사정거리는 두 배가 될 정도며 적중률도 만족스러웠다. 그때 세종은 “이제는 옛 무기가 우스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며 옛 무기들을 모두 파기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개량작업이 이어져 이날 완성을 본 것이다. 그 사이 최장 900보였던 사정거리는 1,500보까지 늘어났다. 건국 56년 만이었다.

고려 말에 도입된 화약무기를 계승 발전시킨 신무기 시스템은 15세기 조선을 강병의 시대로 진입시켰다. ‘총통등록’을 육해군에 전달한 것은 지방에서도 중화기를 제작하라는 의미였다. 여진족과 대마도를 정벌한 군사력은 이 같은 강병 기술이 기초가 됐다.

◇농업 진흥, 역법과 천문기구

국부와 민생을 위한 정책은 과학이었다. 주된 산업인 농업에는 천문과 기후 측정이 필수적이었다. 이를 위해 세종은 이슬람과 원나라 첨단 과학을 계승한 역법과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었다.

15세기 유럽에 다 빈치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세종과 천재 집단이 있었다. 이순지, 김담, 장영실이 그들이다. 세종 본인 또한. 대표적인 산물은 ‘칠정산역법’과 ‘일성정시의’와 ‘옥루’와 ‘측우기’다. 칠정산역법은 원나라와 이슬람 역법을 응용한 역법이며 일성정시의는 해와 별을 통해 낮밤으로 시각을 알 수 있는 시계요, 옥루는 온갖 꽃들과 인형들이 튀어나와 소리로 시각을 알리는 물시계였다. 대륙의 신흥제국 명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던 첨단 기구들이었다. 이제 이들의 생멸을 본다. 탄생은 장엄하였고, 멸망 과정은 괴담怪談이었다.

◇칠정산역법의 탄생

칠정산역법은 세종 14년부터 10년 동안 연구해 나온 작품이다. 명나라로부터 받아오던 역서가 조선과 차이가 나 각종 행사나 농사 시기 조절에 쓰기 위해 자체 제작한 조선의 역서다. 내외편으로 구성된 이 역법은 일곱 별(해, 달,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운항, 일식과 월식 원리를 수학 계산으로 정리했다. 내편은 정인지가, 외편 제작은 산술에 통달한 이순지와 후배 김담이 맡았다.

칠정산에 따르면 한 해 길이는 365일 5시간 48분 45초다. 현대 역법에 1초 모자란다. 당시 세계 최고였던 원나라와 아라비아 역법을 참고로 한 15세기 역법의 결정판이요, 조선왕조가 세종실록 부록에 실을 정도로 자랑스러워한 최고의 산물이었다. 실록에는 이런 평이 붙어 있다.

“역법에 더 아쉬움이 없다 하겠다.”

창경궁에 남아 있는 관천대 기단./박종인

◇앙부일구에서 흠경각까지

1437년 4월 15일 과학 프로젝트팀이 세종에게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완성을 보고했다. 일성정시의는 이름 그대로 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을 관측해 시각을 정하는 천문시계다. 하나는 고정식, 셋은 이동식이다. 장영실이 실무 기술을 맡은 이 시계는 고정식은 궁궐에, 이동식은 기상청인 서운관과 함길도, 평안도 군부대에 배치했다. 또 군 작전 시 이동에 편하도록 작은 일성정시의도 만들어 배치했다.

이보다 3년 전 프로젝트팀은 물시계 ‘자격루自擊漏’와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를 만들었다. 자격루는 복잡하고 거대했고 앙부일구는 밤에는 무용지물이라, 이를 보완한 전천후 시계가 일성정시의였다. 바로 이날 신생 조선왕국은 국가 표준시 측정을 위한 표준 기구 소유국이 되었다.

‘앙부일구’는 백성을 위한 해시계였다. 세종은 앙부일구를 혜정교(현 서울 광화문우체국 옆)와 종묘 앞에 놓고 백성이 시각을 알 수 있도록 했다.67 ‘시각이 정확하고 해 그림자가 명백하다. 길가에 놓아두니 구경꾼이 모여든다. 백성도 만들 줄 알게 되었다[民知作也].’68

‘民知作也 민지작야’

제작 기술을 공개했다는 뜻이다. 아무나 그 시계를 보고 제작해 자기 집이나 마을에 비치해놓고 생활에 사용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7년 뒤인 1441년 제작한 측우기 또한 백성의 생업을 위한 기구였다. 일성정시의 완성 이듬해 나온 흠경각은 15세기 동아시아 최고의 원나라 과학과 유럽을 포함한 서반구 최고 아라비아 과학이 조선 왕실 한복판에서 융합된 것이다. 세종부터 이순지, 김담, 장영실까지 의지가 강한 천재 과학자며 공학자 집단의 성과였다. 이제부터 괴담怪談이다.

경기도 여주 영릉에 있는 일성정시의 모형 부분. /박종인

◇성리학이 질식시킨 과학

역법 연구 목적 가운데 하나는 농사를 제대로 지어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또 다른, 어쩌면 더 큰 목적은 ‘사대事大’였다.

“중국 역서와 비교할 때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내 매우 기뻐하였노라.”

세종 때 역법을 연구한 이유다. 독자적인 조선역법이 아니라 중국 역법에 맞는 역법이 목적이었다. 1442년 12월 16일 세종은 경회루 옆에 있던 천문대를 궐 북쪽으로 옮기게 했다. 머뭇대며 해를 넘기자 이듬해 1월 사헌부 관리 윤사윤이 이유를 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간의대가 경회루에 세워져 있어 중국 사신 눈에 띄게 할 수 없으므로 내 본래부터 옮겨 지으려 하였다.”

중국에 버금가는 독자적인 역법 체계와 천문대가 조선에 있다는 사실이 들키면 좋을 일이 없다는 뜻이다. 과학을 경시한 태도도 성리학에 연유한 태도이고, 사대를 완벽하게 하려는 태도 또한 성리학이 가진 고질적인 증상이었다.

영릉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모형. /박종인

◇괴담 괴담 괴담

1442년 장영실은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 당하고, 기록에서 사라졌다.76 두 달 전 세종이 타는 가마를 불량으로 만든 죄였다. 실컷 부려먹은 노비 출신 공학자는 “불경不敬보다 더 큰 죄는 없다”며 무심히 용도 폐기됐다.

1505년 11월 24일 연산군은 물시계를 창덕궁으로 옮기고 간의대를 뜯어버렸다. 1550년 명종은 흠경각을 실용이 아닌 덕행 수양의 수단으로 인식했다. 명종은 5년 뒤 일본인 도움으로 총통을 만들겠다는 관료들 요청을 거부한 바로 그 왕이다.

1550년 11월 흠경각 수리공사가 있었다. 물을 받는 그릇 하나가 문제였다. 관상감 책임자 이기李芑가 공사를 마치고 명종에게 보고했다. “(이 그릇은) 옛날 성인들이 권계勸戒하던 기구이니 언제나 옆에 두고 물을 부으며 살피고 반성하는 것이 좋겠나이다.”74 명종은 “그리 하겠다”고 답했다. 실용을 목적으로 만든 기계가 ‘덕목 수행[勸戒]’용으로 용도 변경이 된 것이다.

김돈이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던 흠경각도 똑같이 불우했다. 1613년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한성 백성이 불태웠던 흠경각 중건에 착수했다. 공사는 “불필요한 토목공사”라며 명-청 중립주의자인 광해군과 갈등하던 관료들 반대 속에 강행됐고, 결국 완공은 됐다. 그런데 실용주의 지도자인 광해군은 폭군 혐의로 축출됐다.

양 호란을 겪고 효종이 즉위한 뒤 당시 기상청인 관상감 그 누구도 칠정산역법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관상감은 “칠정산역법을 미처 전수해 배우지 못하였으므로 청에 가서 청나라 새 역법을 배워오겠다”고 왕에게 청했다. 효종은 “폭군 광해군이 만든 것”이라며 흠경각을 허물고 그 자리에 대비전을 지었다. 흠경각 건물은 대비전 목재로 사용됐다.

천재들이 문을 연 과학의 시대가 시작하자마자 사라지고 만 것이다. 결국 조선 역사에서 과학사는 사라지고 말았고, 과학은 조선 현실에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1713년 조선 임금 숙종은 이렇게 한탄한다.

“텅 빈 궁궐 안 옛 기기들이(…)그 용법을 아무도 모르니 심히 애석하다”

◇멸종된 과학

그리고 1852년 철종이 이리 묻는다. “종묘 앞에 아직 앙부가 있느냐.”

세종 때 설치했던 앙부일구 2개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대신들은 “종묘 문 앞에 네모난 돌이 있는데 전하기로 앙부일구를 안치하던 대석”이라 답했다.

1930년 6월 초 경성 종로4정목 45번지 국수집 앞 인도 지하에서 바로 그 네모난 대석이 발굴됐다. 1889년 종로에 전차 궤도를 부설하며 땅에 묻어버린 것이었다. 대석은 이후 탑골공원에 전시됐다가 2015년 원래 자리인 종묘광장 입구로 옮겨졌다.

서울 종묘공원에 있는 앙부일구 대석. 조선 후기 내내 실종됐다가 고종 대에 땅이 묻힌 뒤 21세기에 발견됐다. /박종인

조선은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해 실용적으로 사용한 나라였고, 역시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개발해 서적을 대량으로 인쇄한 국가였다. 그 조선에서 자기가 만든 과학기술 사용법을 다 까먹어버리는 참극이 벌어졌다. 성리학 프레임에 매몰된 조선 학자들은 성리학 이외 일체 학문을 그저 성인들이 ‘권계하던 기구’로 쓰고 치워버렸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다음편 <먹고 버린 소 뼈가 성균관 교실에 산을 이룬 이유에 대하여>에서 계속 /선임기자·'대한민국 징비록', ‘매국노 고종'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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