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 후에 군주 노릇을 한 보장왕

임기환 2021. 6. 2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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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126] 668년 9월 당 고종은 고대하던 평양성 함락 소식을 듣고 10월 2일에 궁중에서 문무관원을 불러모아 큰 연회를 베풀며 고구려 정복을 축하하였다. 이때 구부악(九部樂)을 연주하게 했는데, 9부악은 수와 당이 중원을 통일한 후 변방 국가들의 음악과 춤을 모아서 궁중 연회 때 공연하게 한 가무 음악이다. 즉 통일제국의 중화의식, 천하의식의 산물인 셈이다. 이 9부악 중에는 '고려악(기)'이 포함돼 있었으니, 아마 당 고종과 대신들은 당 궁중에서 펼쳐지는 고구려의 음악과 춤으로 정복의 기쁨을 즐겼을 것이다.

평양성을 함락한 이세적은 10월에 들어 보장왕과 남건 등 포로를 이끌고 당으로 출발하였다. 당 고종은 이세적에게 보장왕 등 고구려 포로들을 당 태종 능인 소릉(昭陵)에 먼저 바치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피정복국 통치자를 포로로 잡아 행하는 개선 의례에서 먼저 이뤄지는 태묘(太廟)에 바치는 의례에 앞서 행하게 한 것이다. 고구려 정복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 당 태종의 한을 풀어준다는 뜻이 담긴 것이며, 동시에 아버지도 이루지 못한 고구려 정복을 자신이 이루었음을 자랑하는 심사도 함께 있는 듯하다. 사실 당 고종은 평생 아버지 태종의 그림자 속에 지내야 했던 아들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 뒤 일반적인 개선 의례에 따라 이적은 군대의 위용을 갖추고 장안(長安)에 들어와 태묘에 포로들을 바치는 예를 행하였다. 그리고 12월 7일에 대명궁의 정전인 함원전(含元殿)에서 보장왕 등 포로를 당 고종에게 바치는 헌상 절차를 치렀다. 17일에는 당 고종이 남교(南郊)에서 제사 지내 고려를 평정한 사실을 상제(上帝)에게 아뢰는 예를 행하였고, 19일에 태묘에 배알하는 것으로 고구려 정복의 개선 의례를 마쳤다.

당 장안 대명궁 함원전 복원도 /사진=바이두

이렇게 당이 개선 의례를 치르는 동안 포로가 된 보장왕, 남건 등은 패자로서 수모와 치욕을 견뎌야 했다. 사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 왕족과 대신들은 당에 끌려가 앞서의 개선 의례를 먼저 치른 바 있다. 이들 역시 태묘에 봉헌하는 의례를 거쳐 의자왕 등은 낙양궁 중앙 성문인 측천문 앞으로 끌려갔다. 측천문 남쪽에는 의장대와 수많은 관리, 외국의 사신들은 물론 백성도 운집해 있었다. 당 고종은 측천문 누각에 올라 의자왕 등 포로들이 끌려 나오자 그 죄목을 들어 꾸짖고, 의자왕이 잘못을 빌자 당 고종이 용서하고 석방하여 안치하는 절차가 이루어졌다. '일본서기' 권26 제명(齊明) 6년조에 백제 의자왕 등 포로를 조당에 바친 사실에 대한 일본 견당사 기록이 남아 있다.

이렇듯 멸망한 나라의 군주는 멸망 전의 무능과 폭정만큼, 치러야 할 치욕도 큰 법이다. 당나라에 붙잡혀가 온갖 수모를 당한 의자왕은 얼마 후 병으로 죽었는데, 아마 울분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 조정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 위위경(金紫光祿大夫 衛尉卿)을 추증하고 옛 백제 신하들이 장사 지내도록 허락하였으며,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의 무덤 옆에 의자왕의 시신을 묻고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그런데 손호는 삼국시대 오나라 마지막 황제이며, 진숙보는 남북조시대 진나라 마지막 황제로서 둘 다 폭정과 어리석음으로 나라를 잃은 무능한 군주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따지고 보면 당 조정은 의자왕이 죽은 뒤까지도 의자왕을 모욕한 셈이다.

나라가 멸망한 후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 지배층이 치른 참담한 곤욕을 아마 고구려 지배층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8년 뒤에 같은 치욕을 그대로 반복하는 걸 보면 자신을 돌아보고 타산지석에서 배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하게 된다. 역사에서 수많은 나라와 왕조가 멸망하였지만, 그 멸망의 과정과 배경이나 원인은 대체로 비슷하다. 지배층의 무능과 탐욕, 분열과 배신 등등. 그럼에도 멸망의 과정은 항상 차가운 눈으로 되짚어봐야 하고, 멸망한 나라의 수모와 치욕도 환기해야 한다.

그나마 보장왕은 의자왕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았다. 당 고종은 보장왕의 정치가 스스로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용서하고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원외동정(員外同正)의 벼슬을 주었다. 하지만 보장왕은 포로나 진배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보장왕은 왜 울분으로 의자왕처럼 죽지 않았을까? 군주 노릇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군주로서 마지막 자존심도 없었던 것일까?

그런데 8년여 뒤인 677년 2월, 보장왕은 고구려 유민을 안무하라는 임무를 갖고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에 임명되면서 요동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 유민 다수도 요동으로 돌아가거나 흩어진 유민들을 불러들였다. 고구려 멸망 후부터 벌어진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전쟁에 대해서는 나중에 살펴보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보장왕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다소 시간을 훌쩍 뛰어넘도록 하겠다.

당 정부는 보장왕을 요동으로 보내면서 요동성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신성(新城)으로 이동시키고, 안동도호부에는 연남생을 파견하였다. 그래서 677년 2월 이후 요동 지역은 보장왕을 정점으로 한 고구려 유민들의 자치 및 연남생을 내세운 당나라의 감독과 통제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물론 실질적인 통치력을 발휘했던 인물은 연남생이었다는 점에서 멸망 이전의 고구려 정권에서의 권력관계가 여전히 유지되는 셈이었다. 여기에는 당의 입장에서 연남생을 보장왕보다 더 당에 충직한 존재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즉 연남생에게 주어진 역할은 보장왕에 대한 일종의 견제였다. 망국의 주범이 멸망 이후에도 여전히 반고구려적인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한편 당 정부는 677년 2월 요동 건안성(建安城)에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여 백제 유민들을 이주시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였다. 이곳에서 부여융은 백제 멸망 후 당나라로 강제 이주당한 백제계 유민들을 통치하다가 682년에 사망하였다. 백제 유민을 고구려 옛 땅 건안성에 이주시킨 이유는 역시 보장왕 등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는 신라가 익산에 보덕국을 두어 백제 유민을 견제하려는 정책과 유사하다. 고구려 유민과 백제 유민은 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데 이용되었던 셈이다. 멸망 이전 두 나라 사이에 적극적인 동맹을 맺어본 경험이 없었던 점이 그 배경이 될 것이다.

그런데 679년 1월 29일 보장왕을 감시·통제하던 연남생이 사망하면서 요동 지역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들의 활동에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게다가 679년 10월에는 돌궐이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요서 영주(營州)를 공격하는 등 외부 정세 변화가 나타나고, 고구려 유민 세력들을 통제하던 영주 도독이 돌궐과의 전투에 투입되면서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준비할 수 있는 활동 공간이 열리게 되었다.

요동 등 고구려 지역에서는 멸망 후에도 고구려 부흥운동이 끊임없이 지속되었고, 당나라가 보장왕을 요동에 보낸 이유도 이들에 대한 통제력을 기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보장왕은 오히려 당의 눈을 피해서 이들 부흥운동 세력과 연계를 도모한 듯하다. 요동 지역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고구려 최후의 왕인 보장왕이 구심점이 되면서 점점 폭발력을 갖게 되었다.

멸망 이전 연개소문 가문에 억압되어 군주다운 군주 노릇을 해보지 못한 보장왕은 나라가 멸망하고 10여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고구려 왕으로서 마지막 역할을 기도하였다. 부흥운동 세력에게 단순히 추대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적극적으로 유민 세력을 조직하여 부흥운동을 추진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일부 말갈 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679년부터 시작된 보장왕의 부흥운동을 위한 움직임이 당 조정에 알려졌던 모양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당이 군대를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 행동을 보이지 않은 상황을 보면, 보장왕이 추진하던 부흥운동이 아직 군사력을 조직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좌절되었다고 보인다.

보장왕은 681년에 소환되어 공주(중국 四川省 成都市)로 이치되었으며, 그곳에서 이듬해인 682년에 사망하였다. 아마 자신의 마지막 꿈인 고구려 부흥에 실패한 울분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당 조정은 장안의 동돌궐 힐리가한의 무덤 옆에 보장왕을 장사 지내고 비를 세웠다.

힐리가한은 동돌궐 수장으로 당 태종에게 정복돼 포로로 장안에 끌려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개선 의례를 치르는 수모를 당하였다. 의자왕이나 보장왕은 그 승전례 과정이 남아 있지 않지만, 힐리가한은 그 과정이 '신당서' 등에 전하고 있다. 그는 그 뒤 울화병으로 병이 깊어져 4년 뒤에 사망하였다. 보장왕의 무덤을 힐리가한 옆에 나란히 마련한 것도 당으로서는 가장 두려운 존재였던 돌궐과 고구려 두 나라를 모두 정복했다는 자부심의 표현으로 읽힌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보장왕은 당 고종으로부터 정치에 책임이 없다며 용서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보장왕 자신은 오히려 이를 더욱더 큰 수치로 여겼음 직하다. 그러하지 않았다면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부흥운동을 꾀하였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용기는 고구려 군주 자리에 있었을 때 발휘해야 하지 않았을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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