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칼럼] 당신이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것은

한겨레 2021. 6. 2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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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칼럼]삶은 결핍과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와 자주 굴욕을 강요했다. 그것들이 무참한 착고(着庫)로 나를 묶는 동안 젊음이 쉴 새 없이 부스러져 나갔다. 나는 죽는 것보다 늙는 것이 더 두렵고 싫었다. 어떤 부류와 어떤 권력보다 오직 문학의 족속이고 싶었다. 시인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시인, 화가 아니면 어떤 것도 아닌 치열함이 전부인 그림쟁이, 그런 예술가를 나는 사랑했다.

문정희ㅣ시인

젊음은 잃어버린 후에야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이상한 보석인 것 같다.

젊음이란 무엇일까.

최근 새로 선출된 야당 대표의 나이가 36세! 100세 시대를 맞아 나이와 젊음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터라 다시 여러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젊음은 눈부심 그 자체여서 때로 버릇없고 거칠고 경륜 부족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래서 또한 신선하고 거침없는 도전과 패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내가 이십대 초 갓 등단한 신인이었을 때, 당시 한 문예지가 연말 특집으로 작가들에게 이런 설문을 보냈다. “당신이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것은?”이라는 질문이었다. 나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뜸 “날개”라고 썼다. 그때 나에게 날개란 자유와 동의어였다.

그런데 한 중견 작가는 “젊음”이라고 썼다. 누구보다 탁월한 작품을 써서 두루 인정받는 그 선배 작가가 갖고 싶은 것이 바로 나에게 넘쳐나는 젊음이라니…. 그때 내가 가진 젊음이란 과다한 열망과 싱싱한 에너지로 인하여 심지어 비현실적이고 위태하기까지 한 어설픈 상태였었다.

물론 선배 작가가 말하는 젊음이란 다만 생물학적인 연치(年齒)가 아니라 발랄한 상상력과 새로운 도전을 향한 패기를 포함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늘 젊은 작가로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언어의 용량을 풍부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내면으로는 지적 탐험을 치열하게 하고, 낯선 세계를 떠돌며 나만의 경험을 깊이 쌓아야 할 것 같았다. 이 결심은 현실적으로 실천이 쉽지 않았다. 반복되는 일상과 상투적인 언어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매일 검투사처럼 힘든 대결을 감수하며 젊은 날을 보냈다.

삶은 결핍과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와 자주 굴욕을 강요했다. 그것들이 무참한 착고(着庫)로 나를 묶는 동안 젊음이 쉴 새 없이 부스러져 나갔다. 나는 죽는 것보다 늙는 것이 더 두렵고 싫었다.

어떤 부류와 어떤 권력보다 오직 문학의 족속이고 싶었다. 시인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시인, 화가 아니면 어떤 것도 아닌 치열함이 전부인 그림쟁이, 그런 예술가를 나는 사랑했다. 그리하여 나의 존재에서 시만 보이고 예술만 보일 뿐 나이라든가 늙음이라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 뜨거운 생애를 꿈꾸었다.

겨울밤 서울 서대문구치소 앞에 오랜만에 풀려나는 사위를 만나기 위해 외손자를 등에 업고 서 있는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모습은 참 강렬했다. 그녀는 그날 자신 또한 스스로의 글 감옥에서 잠시 풀려나온 것 같았다. 초라하지만 당당하고 깊은 모습이었다.

그때 내가 사랑한 또 한분의 젊은 예술가는 화가 천경자 선생이었다. 물론 그때 박경리 선생과 마찬가지로 천경자 선생 역시 이미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누구보다 젊고 아름다웠다.

남도창을 틀어놓고 해질녘까지 그림을 그리던 천경자 선생은 화보를 찍으러 온 기자에게 밤샘 작업으로 피곤해진 노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자 그것을 손으로 가리키며 “이 눈물도 찍으시오, 잉” 하고 말했다. 원색의 슬픈 꽃 같은 매혹적인 이미지였다. 불같은 언어로 가득한 황홀한 매력을 지닌 아티스트야말로 가장 젊은 인간으로서 최선의 형태가 아니겠는가. 오랜 내공과 풍부한 경험으로 이룩한 진정한 부자들이라고나 할까. 오스카 와일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육체에 봉인된 젊음을 뛰어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늙음은 그 어디에도 깃들일 틈이 없는 경지일 것이다.

36세의 젊은 당대표를 보며 이번에 내가 주목한 것은 그의 동안이나 그의 엘리트 코스의 학력이 아니라 그가 구사하는 언어였다. 그는 외모만큼이나 젊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상황이나 사물을 보는 투시력과 그것을 논리적인 자기 언어로 표현하고 비유하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그의 언어는 지금부터 실천으로 완성시켜야 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정치는 언어로서 젊어야 한다. 그가 어느 계파이건 진보건 보수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신선한 언어가 아닐까. 그 속에 희망이 있고 그것이 바로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치인들의 언어는 관념적이고 닳고 닳은 상투어가 많았다. 인문학적 기본 소양은 물론 독서 경험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는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가끔 시를 읊조리는 것이 반가워 주목을 해보면 진정 시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애국지사의 시나 만해, 윤동주 등의 시를 읊어 시인의 고통스럽고 순결한 생애에다 자신을 의탁하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정치인들은 심장이 터질 만큼 지극한 사랑시를 낭송할 수 있는 열정과 용기를 보이는 것을 왜 두려워하는 것일까. 미투를 생각하는 것일까. 본질이 다른 문제이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시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시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진정한 시는 감상이나 정서의 토로, 혹은 교훈이나 위로와는 기실 가깝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시는 낡아가는 정신에 균열을 가하는 뜨거운 미적 실험이라고 했다.

어제와 똑같은 나지만 30세가 넘으면 더 이상 젊다고 우기기가 망설여진다고 했던 이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라는 시구로 유명한 잉게보르크 바흐만이다. 나는 ‘나무학교’라는 시를 통하여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고 했다. 자꾸만 늘어가는 나이를 나이테에 새기며 해마다 울창해지는 나무를 배우기로 했다고 노래했다. 그리고 ‘오빠’라는 시를 통하여 “모처럼 물안개 걷혀/ 길도 하늘도 보이기 시작한/ 불혹의 기념으로/ 세상 남자들은/ 이제 모두 나의 오빠가 되었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시를 읽어보면 조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40세가 불혹(不惑)도 아닐뿐더러 40세가 되었다 해서 저절로 길도 안개도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나이와 상관없이 여전히 흔들리고 영원히 미숙한 존재임을 나는 이제 확인할 뿐이다.

늙지도 젊지도 않고 적당히 안정되고 적당히 쓸쓸하고 비로소 고통도 견딜 만한 나이 50세를 콩떡이라 비유한 졸시 ‘오십 세’를 떠올리면 실소가 절로 나온다.

나이 오십을 “말랑하고 구수하고 정겹지만/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않는/ 화려한 뷔페 상 위의 콩떡…”이라 했으니 기가 막힌다.

늘 젊은 시인으로 진정한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겸손이 아니라 이리도 미숙하고 어설픈 채로 나이만 많아져간 것이다.

“당신이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것은?” 오늘 어느 잡지가 이런 설문을 내게 보낸다면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대뜸 “젊음”이라고 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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