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이 나를 말해준다.
# 그리고 책이 남았다 - 2
미국의 소설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쓴 '화씨 451(Fahrenheit 451)'이라는 소설이 있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영화로 만들기도 한 바로 그 소설이다. 소설의 제목 '화씨 451'은 무엇을 의미할까?
화씨 451도는 섭씨로 계산하면 232.7도쯤 되는 온도다. 종이에 불이 붙는 온도다. 이제 실마리가 잡힌다. 이 소설은 책이 불타버린 세상, 즉 책의 디스토피아를 그린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미래세계는 책을 읽거나 소지하면 범죄로 처벌받는 그런 세상이다. 주인공의 직업은 방화수(放火手)다. 책이 발견되는 즉시 압수해 불태우는 것이 그의 임무다.
레이 브레드버리는 책이 죄악시되는 상징적인 상황을 설정해놓고 지성이 죽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린다.
그런 세상에도 책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책을 금지한 정부의 조치를 따르지 않는 일종의 저항세력이다. 책을 인쇄하거나 소장하고 유포하면 박해를 받는 세상을 견디기 위해 이들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지켜나간다. 그들이 택한 방식은 '암기'다. 이들은 책을 통째로 외워서 머릿속에 저장하고, '글'이 아닌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책의 내용을 전달한다. 인간의 뇌가 도서관이나 서점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브래드버리가 그려낸 등장인물들은 '기억'을 무기로 삼아 지성을 말살하는 전체주의에 대항한다. 그들의 '기억'이 있기에 인류는 실낱같은 희망을 이어간다.
소설 중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 등장인물이 말한다.
"혹시 플라톤의 '국가'를 읽고 싶지 않소? 바로 내가 플라톤의 '국가'라오. 아니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읽고 싶소. 그렇다면 시몬스를 찾아가시오. 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요."
참 재미있는 설정이다. 플라톤을 읽은 사람은 곧 플라톤의 분신이고, 아루렐리우스를 읽은 사람은 곧 아우렐리우스의 분신이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광경을 가끔 목격한다. 어떤 텍스트의 빙의(憑依)된 사람이 그 텍스트를 통해 세상을 보는 건 아주 드문 일이 아니다. 빙의된 사람에게 텍스트는 무기이자 위안이며, 구원이자 계시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 텍스트를 통해 도가 트인 사람은 자연스럽게 보편적인 도에도 가까이 갈 수 있다.
브래드버리의 소설적 설정은 매우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어떤 책을 읽고 그것에 공감하고, 그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이미 그 책의 분신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접신한 책은 곧 나의 분신이 된다. 그 분신들이 모여 세상이라는 거대한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것이다.
[허연 문화선임기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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