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혹한 공감, 그들만의 공정

한겨레 2021. 6. 24.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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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다이내믹 도넛]한 뼘의 스포트라이트에 들어가기 위해 사생결단의 쟁투를 벌이는 '소용돌이 사회'는 불평등의 악화와 더불어 절대다수에게 좌절과 모멸감을 강제한다. 이제까지 제대로 셈해지지 못했지만 그런 것이 실은 전부 사회적 비용이다.

[다이내믹 도넛] 박권일ㅣ사회비평가

어떤 ‘공감’은 참 잔혹하다. 2021년 4월, 한강에서 의대생이 친구와 술을 마시다 실종됐다. 아들을 찾아 헤매는 아버지의 애타는 사연이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대대적인 수색 끝에 실종자의 주검이 발견되었지만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경찰 수사 과정은 시시각각 보도됐으며 방송사는 특집 프로그램을 편성했다. 전국이 들끓었다. 많은 시민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그런데 넉달 전인 2020년 12월에도 20대 청년이 한강에서 실종됐었다. 발달장애인인 실종자는 코로나19로 시설에 나가지 못하던 중 어머니와 한강에 산책을 갔다 길을 잃었고, 90일 만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아들을 찾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던 엄마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며 무너졌다. “날씨도 추운데 왜 애를 인적 드문 곳에 데리고 갔냐.” “엄마를 조사해봐라.” “애 보험 들어놨는지 꼭 살펴봐라.”

어떤 ‘공정’은 참 딴판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야당 대표가 된 사람은 중학교 시절 시험 등수를 놓고 치열하게 다툰 경험을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시험보다 공정한 제도가 어디 있느냐”면서 할당제 폐지와 정치인 자격시험을 당당히 요구한다. 한편 18살부터 공장에서 일을 했던 사람은 생각이 다르다. 그는 “사회가 노력으로 쳐주는 건 공무원시험, 의전원 같은 것이지만 그런 건 돈 없으면 못 하는 것들”이라고 지적한다. “난 돈을 벌어야 했고 실패하면 일어설 수 없기 때문에 도전할 용기를 낼 수 없었다.” 그는 소위 ‘개천용’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개천에서 용 난다’는 예외적 성공담을 말한다. 하지만 왜 개천이 존재하는지, 그것이 왜 잘못됐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씨리얼’ 유튜브)

왜 공감은 이토록 잔혹하며, 공정은 이렇게 딴판일까? 본래 따뜻하고 올바른, 그래서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가치들이 아닌가?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이 ‘선택적 공감’이고 ‘선택적 공정’이기 때문이다. 위 사례에서 마지막 발언자만이 편향에 빠지지 않고 구조적 문제를 짚어내고 있다.

심리학자 폴 블룸은 공감을 두가지로 구별한다. 정서적 공감(empathy)과 인지적 공감(sympathy)이다. 정서적 공감은 타인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고, 인지적 공감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정서적 공감은 자신과 비슷하다 느끼는 존재에게 즉각 발동하면서도, 자신과 다르다 느끼는 존재에게는 잘 발동하지 않는다. 블룸은 정서적 공감이 ‘스포트라이트’(spotlight)처럼 좁은 영역에 극히 강한 빛을 내리쬐지만 나머지를 어둠에 방치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의대생 실종에 과몰입하면서도 발달장애인 실종에는 냉담한 사람들이 그 전형적인 예다. 우월하게 여기는 사람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열등하게 여기는 사람을 공감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 타고난 본성이 아니라 가정이나 학교에서 학습된 결과다. 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이를 ‘편견학습’이라 불렀다.

선택적 공감은 이렇게 누군가에겐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지만 누군가에겐 말할 수 없이 잔인하다. 다만 대개 의도하지 않은 반응이라는 점에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반면 선택적 공정은 죄질이 나쁘다. “시험은 완벽하게 공정한 경쟁”이라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의도적으로 공정 개념을 왜곡한다. 사실 이들은 비례적 형평, 즉 기여와 성과를 ‘칼같이’ 계산하는 일에 별 관심이 없다. 만약 이들이 정말 형평을 추구했다면, 같은 일을 하고도 고용불안을 감수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혜택을 더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사는 노동의 가치가 아닌 시험 성적에 따른 특권, 지대(rent)일 뿐이다. 지대를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시험처럼 특정 집단에 유리한 진입장벽을 점점 높여가는 게 필수다. 이게 바로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말한 ‘사회적 봉쇄’다.

한 뼘의 스포트라이트에 들어가기 위해 사생결단의 쟁투를 벌이는 ‘소용돌이 사회’는 불평등의 악화와 더불어 절대다수에게 좌절과 모멸감을 강제한다. 이제까지 제대로 셈해지지 못했지만 그런 것이 실은 전부 사회적 비용이다. 지금 필요한 건 스포트라이트가 아닌 ‘스프레드라이트’(spread light)다. 조금 약한 빛이어도 좋으니 더 골고루, 더 넓게 비추어야 한다. 그게 더 나은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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