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잘 듣고, 말하고, 보고 있는 것일까[플랫]

플랫팀 twitter.com/flatflat38 2021. 6. 2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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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이길보라의 논픽션의 세계
온라인 플랫폼 Theatre For All(theatreforall.net)의 첫 화면 갈무리. 다양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배리어 프리 콘텐츠를 감상하는 모습의 일러스트.


‘세계 여성의날’을 기념하여 작가, 기자, 영화감독이 모여 기념일의 의미를 되짚고 한국사회는 성평등한지, 여성의 위치는 어떤지 이야기하는 자리에 초대받았다. 촬영장에 도착하니 행사 기획과 진행을 맡은 두 명의 여성이 맞았다. 패널로 초대받은 이들은 평소에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던 여성들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뒤로 크고 작은 카메라 여섯 대가 놓여 있었다. 30~50대 남성으로 구성된 대여섯명의 촬영팀이 부산히 움직였다. 그중 총연출자로 보이는 사람이 무신경하게 물었다.

“그런데 이거 무슨 행사예요?”

1908년 3월8일, 미국의 섬유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을 견디다 못해 거리로 뛰쳐나왔다. 노동 조건 개선과 여성의 지위 향상, 참정권 등을 요구하며 외쳤다.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

빵은 굶주림을 해소할 생존권을, 장미는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뜻한다. 그날을 기념하여 매년 3월8일에는 전 세계 각지에서 여성의 인권과 성평등을 요구함과 동시에 연대와 투쟁의 역사를 기념하고 기린다. 그날 촬영도 그런 취지였다. 세계 여성의날이 제정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받지 못한다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 성차별, 성폭력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어딘가 좀 이상했다. 분명 말을 하고 있는데 아무도 듣지 않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패널은 공감하며 박수를 치고 경청했다.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두 명의 여성 역시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카메라 뒤에 선 사람들은 어쩐지 그렇지 않아 보였다. 어떤 사람도 이야기를 듣고 있지 않았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편협한 성별 이분법적인 구분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지만 그랬다. 물론 촬영팀이 행사 내용에 공감하거나 동의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계약관계에 의해 ‘촬영’을 하러 온 것이니 그럴 의무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촬영을 한다는 것, 카메라를 통해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무엇일까? 현장에 가보거나 인터뷰를 해본 사람은 안다. 카메라 뒤에 선 사람과 앞에 선 사람의 미묘한 긴장관계는 그날의 이야기를 망치기도 하고 성공시키기도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에 있어 카메라를 든 사람과 피사체 사이의 관계맺음이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카메라 뒤에 선 사람과 앞에 선 사람의 미묘한 긴장관계는 그날의 이야기를 망치기도 하고 성공시키기도 한다. 이미지컷

인터뷰를 진행할 때 인터뷰를 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인터뷰를 당하는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가 결정된다. 그만큼 논픽션의 영역에서 듣고, 보고, 묻는 태도로 이루어지는 관계맺음과 그에 따른 긴장은 중요하다. 픽션 영화(극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촬영현장에서 배우가 얼마만큼 극에 이입할지는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의 관계, 촬영장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말이 방향을 잃고 고꾸라졌다. 카메라 뒤에 선 사람들의 무표정한 얼굴, 휴대폰을 꺼내 딴짓을 하는 태도, 허공을 보는 시선, 불편한 분위기에 번번이 미끄러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두 명의 담당자는 제한된 시간 안에 어떻게든 촬영을 마치기 위해 과도한 감정 노동을 했다. 더 크게 고개를 끄덕였고 또렷한 눈빛을 보냈다. 고민이 시작됐다. 이상하지 않냐며 문제를 제기하고 촬영을 중단할 것인가, 과도한 감정 노동을 봐서라도 끝까지 해낼 것인가, 현실은 이렇더라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할 것인가.



참석한 패널은 ‘진지’한 표정인데
촬영 스태프는 ‘무표정’ 일색
초대받은 같은 공간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분위기에 의문 들었다



사회적 책무가 이겼다. 촬영을 마치기 위해 모두가 노력하고 있으니 일단 끝내기로 했다. 일상 속에서의 성차별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는 이야기를 하던 대목이었을까. 갑자기 한숨 소리가 들렸다. 놀라 주위를 둘러봤다. 카메라 뒤에 앉은 누군가에게서 나온 소리였다. 나를 쳐다보는 저 사람이 쉰 한숨일까?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사람일까? 지루해서 그런 걸까?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때우는 사람이 낸 걸까? 무의식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한숨 소리였는데? 의심과 의혹이 솟구쳐 올랐다. 당혹감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다. 다들 어떻게든 한숨 소리가 주는 무력감을 메우려고 갖은 애를 썼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영화 <하얀 새>의 주인공인 시각장애인 시라토리 겐지(중간)과 다른 등장인물, 이 영화의 가와우치 아리오 감독(오른쪽)이 함께 미술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 Theatre For All 홈페이지



시어터포올(Theatre For all, theatreforall.net)은 말 그대로 모두를 위한 극장이다. 영화, 연극, 퍼포먼스와 같은 콘텐츠, 토론회 등의 행사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자막과 통역 기능을 더해 제공하는 배급사이자 온라인 플랫폼이다. 시어터포올의 ‘모두’는 다양한 감각과 언어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포함한다. 일본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의 음성언어로 자막을 제공할 뿐 아니라, 시각적인 이미지와 내용을 해설하는 화면해설 자막, 수어통역 영상, 음악을 비롯한 모든 소리를 자막으로 전달하는 전체 자막이 포함된다. 연극이나 퍼포먼스, 토론회 같은 행사를 기록하여 자막과 통역을 제공하기도 한다. 비장애인 중심으로 제작되는 콘텐츠에 단순히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자막을 제공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콘텐츠로 만들어 배급한다. 영화 <하얀 새 A White Bird>(2021)는 시어터포올에서의 배급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영화는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시각장애인은 미술관에서 작품을 어떻게 감상할까?”

주인공 시라토리 겐지는 20년 동안 미술 작품을 감상해온 시각장애인이다. 영화는 그가 밥을 해먹고 공과금을 내고 장을 보는 것처럼 미술관에 가는 일 역시 평범한 일과 중 하나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그가 미술관에 등장하면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한다.

“시각장애인이 미술 작품을 관람한다고?”

“보이지가 않잖아? 작품은 만질 수 없는데?”

그가 원하는 건 작품을 만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말’로 작품을 감상하길 원했다. 요청에 따라 작품을 ‘말’로 옮겨줄 해설자가 붙었다.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의 확장으로 삶을 살아가는 그가 관람객이 되자, 미술관은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된다. 낯설게 보고 새롭게 듣기를 촉진한다.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품을 ‘본다’. 시각이라는 감각을 사용하지 않는 이에게 작품을 어떻게 소개할지 고민하며 눈에 보이는 것을 묘사한다. 더 나아가 그의 감각 체계 속에서 작품이 어떻게 그려질지 상상한다. 해설을 넘어 통역을 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보고 말하고 듣는다. 작품을 다르게 감상하고 감각하는 법을 체득한다. 그들은 말한다. 이건 불쌍한 장애인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감각을 통한 새로운 방식의 보기, 사유하기, 말하기, 듣기가 이루어지는 현장이라고.



영화 ‘하얀 새’ 속 시각장애인이
미술 작품 관람하자 사람들은 당황했다
그가 원하는 건 작품을 만지는 것이
아닌 ‘말’로 작품 감상하는 것이다



감독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어떻게 ‘듣고’ 있는지를 영화라는 시청각매체를 통해 이미지와 소리로 풀어낸다. ‘말’의 세계를 보고 듣는 영역으로 확장시켜 새롭게 재해석한다. 관객은 영화를 보며 적극적으로 주인공과 해설자에게 감정이입을 한다. 내가 해설자라면 저 작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주인공이라면 어떻게 상상하고 감각할까? 나는 과연 어떻게 보고 있으며 어떻게 듣고 있는가?

영화 <하얀 새>의 크레디트 중 한 장면, 써 있는 큰 글자는 영화 제목 ‘하얀 새’의 타이포그래픽이다. ALPS TICTURES 제공



영화 <하얀 새>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말하고, 듣고, 본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카메라 앞에 앉으면 모든 것을 보게 된다. 시선을 던져야 할 카메라의 렌즈, 사회자의 얼굴 표정과 눈, 말하고 듣기를 통해 형성되는 상호 신뢰관계인 라포르(Rapport), 그와 나 사이의 긴장,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태도까지. 이를 통해 그들은 나의 1차 관객이 된다. 촬영팀이 카메라를 조작하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엄지를 세우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와 시선을 맞추면 그제야 나의 말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럼 더 잘 말할 수 있다. 그가 내 말을 듣고 있고, 나는 그쪽을 향해 말하고 있으니까. 나는 그를 보고 있고, 그 역시 나를 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도
‘나’가 ‘너’가 되어보지 못한 상황에서
당신의 말을 제대로 못 듣고, 못 보고,
다르게 말해 빚어진 것 아닐까



누군가는 장애인이 등장하는 영화와 배리어 프리 자막이 앞서 언급한 한숨 소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페미니즘과 장애를 다 떠나서, 이 모든 건 잘 듣고 말하고 보는 일에 관한 일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도, 다름에 대한 혐오와 차별도, 결국 ‘나’가 ‘너’가 되어보지 못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닐까. 당신의 말을 잘 듣지 못해서, 제대로 보지 못해서, 다르게 말하기 어려워서 만들어진 상황은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타인의 경험과 감각을 상상하며 말하고 있을까? 나의 위치가 아닌, 너의 위치에서 듣고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다르게 생각하고 사유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이길보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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