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자만하면, 홀린 듯 길을 잃는다

석의영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2021. 6. 2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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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산행기
하산을 완료하고 날머리에 자리 잡은 장암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다.
한북정맥 최고봉인 국망봉(1,168m)에 오르자는 연락이 왔다. 월악산 산행 따라갔다가 혼난 지 보름도 안 됐는데, 새 봄 들어 벌써 세 번째 산행 공지다. 날 저무는데 갈 길 먼 나그네의 서두름일까, 칠순 넘은 친구들의 넘치는 의욕에 조바심이 엿보인다.
동서울터미널에서 모여 오전 10시 출발해 포천 이동에 11시 20분 도착, 택시로 국망봉자연휴양림 입구까지 가서 정오경 등산을 시작한다. 오늘 산행코스는 대피소가 있는 제2등산로로 국망봉에 올라 신로령고개에서 장암저수지로 내려오는 최단 코스다. 귀경 막차가 오후 8시 20분이라 자칫 늦어지면 저녁도 굶을 터이므로 계곡길이 험하지만 정상에 조금 더 빨리 닿을 수 있는 등산로를 택했다는 것이 리더인 승순의 설명이었다. 지난번 월악산에서 늦게 하산한 탓에 식당이 죄다 문 닫아 귀경 도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허겁지겁 배를 채웠던 터라 수긍이 갔지만, 높은 산 최단 코스면 가파를 것이라는 생각에 내심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등산 초보인 나의 두려움을 없애 주려는지 나를 위한 특별산행이라고 공지까지 붙었으니, 의연한 척 따라나섰다.
휴양림 입구 매표소엔 입장료 2,000원이라 써 붙여 놨지만, 상주하는 인원이 없었다. 우리가 7시간 산행하는 도중 산객을 겨우 두 명 만났으니 아마 비수기라 수지가 안 맞아서 사람을 배치 안 해둔 모양이다. 돈을 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등산로를 잘 닦아놓은 것도 아닌데 무료입장으로 계속 열어두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휴양림 쪽으로 가는 포장된 길을 조금 따라 오르자 오른쪽으로 등산로 표식이 있는 임도가 나타나고, 500여 m 오르자 낡은 등산로 안내판과 제2등산로 표식이 있는 곳에 사다리 같은 철제 계단이 있다. 뱅뱅 돌며 치솟아 오르던 월악산 철제 계단에 비하면 아기 다리 같다.
맑고 따스한 봄날에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는 산을 오른다. 폭신폭신한 부엽토를 밟으며 산을 오른다. 위로 올라갈수록 등산로엔 아직도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나무뿌리나 돌을 계단 삼아 오르자니 자연적이며 전형적인 흙산의 참맛이 느껴진다.
첫 번째 닿은 헬리포트에 점심상을 펼쳐놓고 낙현이 싸 온 부인의 정성 담긴 맛깔 나는 음식에 막걸리 한 잔 곁들이니 낙원이 따로 없다. 여기가 정상이면 희희낙락하다 내려가면 좋겠지만, 왼편으로 신로봉만 보일 뿐 국망봉은 아직 초대면도 못 했으니 서둘러 점점 가팔라지는 산길을 오른다. 국망봉의 옆모습은 정상 전 1.5km에서부터 오른쪽에 보이기 시작하더니 800m 앞둔 대피소에 이르니 선연하게 다가온다.
대피소는 실내 공간도 넓고 시설도 나무랄 데가 없다. 카페인 양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담소하다 정상을 향해 마지막 피치를 올린다. 낙엽 쌓인 멋진 자작나무숲을 지나자 갑자기 가파르고 험한 로프지대가 나타난다. 이리저리 파인 바닥은 바위와 얼음 투성이, 올라갈수록 이건 등산로가 아니라 얼어붙은 계곡 같다.
국망봉 정상에 선 필자와 친구들.
국망봉 정상에서 궁예를 떠올리다
춘삼월에 아이젠을 생각 못 한 죄로 늙은이들이 밧줄에 의지해 서커스를 하려니 그런 곤욕이 없다. 천신만고 끝에 정상까지 60m 남았다는 마지막 이정표를 지나쳤으나 혼자 뒤처졌던 터라 정신없이 얼음골을 치오르는데, 이젠 거의 다 왔다 싶을 즈음 길이 갈라지며 오른쪽으로 산책로 같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어디로 가야 하나? 친구들은 간 곳 없고 오르던 방향의 가파른 얼음길 끝에 정상은 안 보이고 하늘만 보이는지라 돌아서 올라가나 하고 샛길로 들어서는데 꺾여 있는 팔뚝만 한 나뭇가지가 허리께를 막고 있다.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으나 개의치 않고 가지를 살짝 들치고 진행하니 정상으로 가는 오름길이 아니라, 숲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어이쿠, 잘못 들어섰구나’하고 승순에게 전화하니 돌아서 오던 길로 다시 올라오라 한다. 위를 쳐다보니 빤히 보이는 곳에 친구들이 보인다.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진 꼴이 되어 돌아온 민망한 내 모습을 본 갈림길 나뭇가지에 걸린 노란 리본이 우습다는 듯이 팔랑거렸다.
국망봉 정상은 헬리포트가 있는 너른 공터다. 사방이 확 틔어 있어 한 바퀴 돌아보면 아름다운 산하가 담긴 한 편의 파노라마를 보는 듯하다. 국망봉에 담긴 궁예의 서글픈 이야기를 생각하며 북녘 철원 쪽을 바라본다. 현재 DMZ 중앙에 위치한다는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 태봉국의 도성이었던 철원성. 충언하는 부인 강씨마저 유배시키고, 권력에 취해 폭정을 일삼던 궁예는 왕건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도주하다가, 내쫓았던 강씨를 찾아 인근의 강씨봉을 찾았으나 이미 죽어 무덤만 남아 있자 이곳에 올라 통한의 눈물을 뿌리며 불타는 철원성을 망연히 바라보았다는 전설이 있는 국망봉.
정상에 서서 우매한 인간들의 반복되는 서글픈 역사를 생각한다. 돈에 미치고 권력에 취하면, 내가 자만해 정상을 코앞에 두고 가지 말라고 막아놓은 나뭇가지를 서슴없이 들치고 샛길로 빠진 것처럼 아무리 코앞에 경고문을 붙여놓아도 패가망신의 길로 들어선다는 것을.
오후 4시경 왔던 길로 정상에서 내려와 도마치재를 가리키는 이정표를 따라 신로봉 쪽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가파른 능선은 길이 아니라 얼음판이고, 길 양옆도 넝쿨이 뒤엉킨 숲이라 진입이 쉽지 않은 그 길을 어찌나 정신없이 내려왔는지 그 구간 지나온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스틱도 없이 산행하는 건각인 종만이는 맨손으로 숲을 헤치며 헬리포트 두 개를 지나 1.8km의 그 험한 길을 나보다 먼저 내려와 신로령고개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휴양림으로 내려가는 지름길인 왼쪽 길은 급경사 암벽지대로 조난사건이 줄짓는다는 소문이 나 있다. 너덜로 이루어진 이 길은 스틱도 소용없어 손과 발을 로프에 의지해 내려와야 하는데, 나는 발 한 번 삐끗하면 골로 갈 거 같아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이에 대한 보상일까? 드문드문 바위 틈새에 보석처럼 박힌 복수초, 현호색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신로령과 휴양림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을 지나면 비록 너덜바위 지대라 해도 내려오기가 한결 수월하다. 오른쪽에 깊은 계곡을 끼고 내려오는데, 얼음골을 지나 흘러내리는 수정 같은 맑은 물에 손을 담그니 흐늘거리던 신경들이 발딱 일어선다.
오후 6시가 좀 지난 시각인데, 휴양림 쪽으로 접어든 길은 벌써 어둑하다. 석양빛에 물들어가는 장암저수지를 바라보고 서있자니, 오늘 7시간의 산행이 왠지 인생을 종주한 느낌이 든다. 복기하듯이 오늘 산행을 되짚어보며 걷는 저 앞에, 대기시킨 택시의 비상등이 깜빡이고 있다. 늦지 않았으니 또 새롭게 달려보자는 듯이….

본 기사는 월간산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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