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둔 58세 식스팩 할배..세미 세이기너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78년 사고로 부모 잃고, 재혼한 세나이의 가족과 각별"
[헤럴드경제=조용직 기자] “어머니는 결혼을 두 번 했지요. 첫 결혼에서 셋, 두번째 결혼에서 셋 이렇게 여섯의 자식을 뒀습니다. 4남2녀 중 나는 다섯째고, 막내인 여동생이 1966년생(55세)이에요. 나와 여동생은 1978년에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었습니다. 그 때부터 가족 구성원 모두의 삶이 엇갈렸어요.”
단지 가족들과 여가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일상적 질문을 받았을 뿐인데 집안의 비극적인 과거를 불쑥 끄집어낸다. 그러곤 담담한 투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제는 7년보다 더 전부터 세나이(편집자주: 터키의 인기 배우 세나이 굴러. 세미는 각각 재혼이다)와 관계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의 가족과 내 가족은 한가족이나 다름 없이 가깝습니다. 그는 10살 난 손녀딸을 뒀습니다. 난 자식이 없지만 곧바로 할아버지가 됐어요! 먼곳에 떨어져 있지만 그녀의 가족과도 자주 연락하면서, 만날 때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3쿠션 당구의 슈퍼스타, ‘미스터 매직’ 세미 세이기너(58·터키). 그의 인생역정만큼이나 그가 펼치는 플레이는 변화무쌍하다. 공에 무시무시한 회전을 가해 상상하지 못한 움직임으로 꿈틀거리게 하거나 기발한 진로를 그리며 득점하는 장면은 흡사 마술 쇼를 방불케 한다.
애초에 역대 예술구 세계 1인자다. 마이크 마세이, 로베르토 로하스, 플로리안 콜러 같은 신구 유명 아티스트가 있지만 스트로크의 속도와 강함, 회전의 RPM에서 감히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정면 끌어치기로 손쉽게 대회전을 구사하는 그라면 끌어치기 3회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SF적 상상을 해 본다.
세미 세이기너는 오는 7월 1일 원주에서 총상금 4억원을 걸고 열리는 ‘호텔인터불고원주 월드 3쿠션 그랑프리’에 출전한다. 최근 입국을 마치고 자가격리 중인 그와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의 당구, 대회 출전 각오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사생활도 허용한 선에서 잠시 엿볼 수 있었다.
세이기너의 화려함은 플레이 스타일뿐 아니라 ‘터키 왕자’란 별명에서처럼 외모에서도 드러난다. 강력한 피지컬이 필수가 아닌 당구에선 드물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철저히 하는 운동광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식스팩과 75㎏ 체중(신장은 184㎝)을 유지하고 있다. 머리 숱이 부족해졌음에도 아랑곳 없이, 당구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약간 거만한 언행이 겹치면서, 종종 자기애와 스타의식이 지나치다는 지적을 받을 정도다.
“코로나 때문에 요즘엔 쇼핑 갈 때 빼곤 거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물론 집에 당구 테이블이 있어서 내 약점을 보완하는 훈련을 집중적으로 했습니다. 다니던 PT스튜디오에 가지 못하게 돼서 당구 테이블이 있는 집에 작은 체육시설도 놨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 피트니스를 정말 많이 했지요.”
그는 지난 해 7월 이탈리아 큐 브랜드 롱고니와 오랜 계약을 마치고 미국의 프레대터와 계약을 맺었다. “최신기술이 적용된 레보 상대와 빅토리 팁은 공을 정확하게 치는 데 유리해 매우 만족스럽다”고. 이번 대회 출전을 앞두고는 심신을 튼튼히 유지하고 있다며, 다만 자가격리 14일 후에는 어떨지 모르겠다고 살짝 걱정했다. 자가격리 기간동안 당구대를 찾아다닐 수 없기 때문에 연습이 불가능하고 그만큼 외국인 선수에게 불리한 건 어쩔 수 없다.
세이기너가 예술구만 잘하는 게 아니 건 팬들이 다 안다. 본무대인 3쿠션 토너먼트에서 2003년 세계선수권과 통산 6번의 월드컵을 제패한 전통의 강자다. 그의 하이런 기록은 공식적으로 22점이고 비공식 기록은 31점이라고 한다. 이번 인터뷰에서 누가 최고의 선수냐고 묻는 질문에는 물음표 3개 ‘???’로 답했다. 그의 성격을 고려할 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나”라는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런 그가 과거와 같은 성적을 아직 못 내고 있어 팬들의 안타까움을 산다. 아마 본인이 가장 갈증을 느낄 것이다. 2004년 이후로는 연중 4~6회 열리는 최고권위의 월드컵 대회 우승 소식을 못 전하고 있다.
2007년 터키연맹과 불화로 국제대회 출전 자격을 7년이나 박탈당해 경기감각을 잃었던 것도 원인이지만, 그 사이 달라진 시대의 조류를 읽지 못 한 것도 부진의 이유로 꼽힌다. ‘똑딱똑딱’ 단순하고 정교한 스트로크로 득점확률을 높이는 식으로 세계 당구가 발전한 사이 그는 강한 베팅과 많은 회전이라는 화려함을 내려놓지 못했다는 것이다.
2019년 한국의 서바이벌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면서 모처럼 활짝 웃을 수 있었던 건 이에 대한 성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확실히 그의 브리지는 전보다 공 앞에 바짝 붙고, 공격 일변도에서 벗어나 수비적인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기상천외한 샷 시도는 구사 횟수가 줄었다. 화려함을 일부 포기하고 득점력을 끌어올렸다. 굳이 표현하자면 ‘뉴 세미 스타일’인데, 이게 더 상대에게 압박감을 주는 건 분명해 보인다.
“맛세 샷과 밑둥을 들어올리는 샷이 가장 자신있어요. 우리 같은 프로 선수는 단지 토너먼트에 출전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늘 그렇듯 한국팬들의 따뜻한 응원을 기대한다는 그는 경기가 안 풀릴 때는 숨을 죽인 채 단번에 상황을 반전시킬 기회를 노린다고 말했다. 3쿠션 WGP라는 큰 사냥감을 노리는 그는 지금 한 마리의 ‘프레대터’다.
yj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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