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내 이름 쓸 수 이따"..경로당에 활짝 핀 시심

최예린 2021. 6. 24.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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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시 2016년부터 '찾아가는 한글대학' 운영
강사가 경로당·마을회관 찾아가 한글 수업하는 방식
어르신들 "여러사람 어울릴 수 있어" 호평
학습자 글 모아 시집 <내 이름 쓸 수 이따> 출간
어르신 기자단 뽑아 유튜브 활동하기도
논산 한글대학의 ‘한마음 글마실 어르신 기자단’ 6명이 지난 16일 논산시 열린도서관에 모여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윗줄 맨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송옥씨(72), 장재순(76), 최선자(79), 배정수(78), 윤석을(76), 이길자(79) 할머니. 최예린 기자

“내 핸드폰이 워딨대? 못 봤슈?”

“몰러. 워디다 두고 그런댜.”

“워매, 여깄네. 급살 벼락 맞을 거. 하하하하.”

지난 16일 충남 논산시 채운면 야화2리 경로당은 할머니 학생들의 수다 소리로 시끄러웠다. 쌍시옷으로 시작하는 싹트다, 썰다, 쑥스럽다, 쓸쓸하다 등의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꾹꾹 눌러쓰면서 할머니들은 쉴새 없이 재잘거렸다.

야화2리 경로당 한글대학의 분위기 메이커인 김경숙(79) 할머니는 오랜만에 경로당에 오니 “살 것 같다”고 했다. 야화2리 경로당 역시 코로나19로 문을 닫았다가 어르신들 백신접종 이후 지난 10일부터 겨우 다시 문을 열었다. 친구들과 함께 재밌는 한글 공부를 못 하는 동안 김 할머니는 “울화통이 터질 뻔” 했다.

김 할머니는 한글을 배우고 간판도 읽고 안내문도 읽을 수 있는 것이 제일 좋다고 했다. “관광을 가서 ‘뱀 조심. 들어가지 마세요’란 간판도 못 읽었는데, 이제 읽을 수 있어 정말 좋다”고 말하는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같은 반 임소례(84) 할머니는 쌍받침 쓰기가 영 어렵다. 열심히 배우지만 자꾸만 잊어버린다. 글을 배워서 정말 좋지만, 자식들한테 먼저 쓴 글을 보여 준 적은 없다. “자식이라도 창피해서”라고 했다. 임 할머니는 찾아와서 한글도 가르쳐 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는 선생님이 “말할 수 없이 좋고, 딸처럼 임의롭다”고 했다.

지난 16일 논산시 충남 논산시 채운면 야화2리 경로당에서 11명 어르신이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시집…내 이름 쓸 수 이따

‘아이고 군인 대장인지 알았는디/시집 와 보니 대장간집 아들이더라/허청에는 호미 낫이 널부러져 있고/장정들 쇠로 매질소리/내 귀청 떨어지네/일꾼 밥 해주는 일이/왜 이리 힘들었던지’

논산시 상월면 월오2리에 사는 김광자(83) 할머니는 열 다섯살에 서울로 식모살이를 갔다. 여덟 남매의 가난한 집, 입 하나 덜자는 부모님 뜻이었다. 김 할머니는 “맨날 요만 지겹게 빨았다”고 그 시절을 기억했다. 기차소리만 나면 집에 오고 싶어 울던 시절을 지나 스물 한살 시집을 갔다. 군인 대장에 동생이 3명뿐이라던 남편은 대장간집 열 남매 중 맏이였다.

김 할머니는 한글대학 백일장에 고생만 시키다 본인 나이 마흔에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시를 써냈다. 안도현 시인은 김 할머니의 시를 읽고 “이 (시의) 유희 속에는 절망을 끌어안으면서 현실을 인내하는 화자의 슬픔이 내재하여 있다“며 “이 짧은 한 편의 시는 김광자 어르신의 ‘생애사’의 압축”이라고 했다.

‘당신 생각하며 술 한 잔을/연산홍(영산홍)에 뿌린다/살아생전 당신이 담 뒷곁에 가득 심은/연산홍/다 죽고 하나 남았다/이제 내 나이 팔십이 넘었다/연산홍 보며 당신 생각하며/아! 여보 보고 싶어요’

연산면 장전1리의 신섭(85) 할머니는 “우리집 연산홍이 내 사연”이라고 했다. 죽기 전 남편이 담 밑에 심어놓은 영산홍을 바라보며 시를 썼다. 할머니는 시동생 여덟에 고생은 시켰어도, 세상 법 없이도 살, 착하고 순했던 남편이 그리워 울었다. “11년 전 자식들 시집·장가도 다 못 보내고 눈 감은 불쌍한 남편은 가고 없는데 연산홍만 남았다”며 서러워했다.

할머니들의 시는 지난해 11월 발간된 시집 <내 이름 쓸 수 이따>에 실렸다. 논산시는 해마다 발간되는 백일장 모음집에 실린 한글대학 학생들의 시와 그림 중 수작을 뽑아 시집을 만들었다. 어르신들의 삐뚤빼뚤한 글씨와 투박한 그림을 최대한 살려 담으려 노력했다. 틀린 맞춤법도 그대로 뒀다. 어르신들은 먼저 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참말로 당신이 좋아하던 뜨끈한 고깃국을 건넸고(‘참말로 그립네’, 이일분), 엄마라는 글자를 배우고 싶어 한글대학을 다닌다고 고백했으며(‘그리움’, 윤금옥), 이제 “내 이름 쓸 수 있으니 자식들도 조하한다”는 자랑도(‘양옥순 호강하네’, 양옥순) 했다. 어르신들의 서툰 진심이 시집에 담겼다.

안 시인은 이 시집에 대해 “어르신들의 시는 쉽고 따뜻하고 깊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 중에 가장 소중한 게 진정성이라면 이 시집은 그 진정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평했다.

시집 <내 이름 쓸 수 이따> 표지. 논산시 제공

마을에서 배운다…‘찾아가는 한글대학’

논산시는 현재 지역 내 350개 마을에서 ‘찾아가는 한글대학’을 운영 중이다. ‘찾아가는 한글대학(한글대학)’은 강사가 경로당이나 마을회관에 직접 찾아가 어르신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논산형 문해(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교육이다. 2016년 22곳(280여명)→2017년 145곳(1500여명)→2018년 302곳(2900여명)→2019년 341곳(3200여명)→2020년 350곳(3200여명)으로 해마다 한글대학에 참여하는 마을의 수와 인원이 늘고 있다. 강사 수도 2016년 12명에서 지난해 140명으로 11배 이상 늘었다. 현재 논산시 전체 마을(495곳) 중 약 70%(350곳)에서 한글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한글대학은 글을 배우려면 먼 길을 나서야 하는 어르신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시작됐다. 황명선 논산시장은 “새벽에 일어나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한글 공부하러 시내로 나왔다는 한 어르신의 사연을 듣고 마을로 찾아가서 한글을 가르쳐드리는 방식의 문해교육을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다.

논산시는 한글대학을 시작하고 1년 뒤인 2017년 한글대학 운영을 위한 전담팀(행복배움팀)을 만들었다. 팀장 포함 4명의 직원이 한글대학 관련한 업무만 맡아 하고 있다. 논산시는 한글대학 사업으로 지난해 11월 대한민국 평생학습대상에서 교육부장관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 16일 논산시 충남 논산시 채운면 야화2리 경로당에서 김경숙(79) 할머니가 한글 공부를 하고 있다. 최예린 기자

어르신들의 만족도도 높다. 여럿이 함께 공부하는 방식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다. 지난 3월 발간된 ‘논산시 한글대학 성과평가 및 발전방안’ 연구 용역 보고서를 보면, 한글대학을 다니면서 가장 좋은 점으로 한글대학 학습자의 70.9%가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 있다는 점’을 꼽았다. 다음으로는 ‘한글을 읽을 수 있다’(41.3%), ‘일상생활에 도움이 된다’(23.4%), ‘가족들과 관계가 좋아졌다’(9.22%) 등이 뒤를 이었다.

코로나19로 비대면 한글배달학교(학습지 배달 방식)를 운영했던 지난해를 빼고 해마다 한글대학 입학식과 수료식도 진행했다. 올해는 명예학력인정제도를 도입하고 첫 졸업식도 진행할 예정이다. 명예학력인정제도는 논산시 자체적으로 한글대학 교육과정을 수료한 이의 학습 결과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엄해경 논산시 행복배움팀장은 “어르신마다 마을마다 실력이 천차만별”이라며 “사람따라 마을따라 구별해 졸업장을 주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이런 이유로 일정 기간 한글대학을 수료만 하면 논산시에서 명예 학력을 인정해주는 제도를 도입하게 됐다”고 말했다.

2016년 논산시 은진면의 건양대 콘서트홀에서 열린 찾아가는 한글대학 수료식에서 한 어르신이 활짝 웃고 있다. 논산시 제공

우리는 한글대학 기자단

논산시 연무읍 마전3리 한글대학에 다니는 윤석을(76) 할머니는 지난해 5월 감투를 썼다. 배정수(78), 장재순(76), 송옥씨(72) 할머니와 함께 ‘한마음 글마실 어르신 기자단’에 뽑힌 것이다. 올해는 이길자(79), 최선자(79) 할머니 등 5명도 어르신 기자단에 합류했다. 한마음 글마실은 한글대학 어르신들과 선생님 기자단이 함께 만드는 소식지다. 한글대학에서 공부하는 마을과 학습자들을 소개하고, 한글대학 강사와 다른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도 싣는다. 어르신 기자단은 소식지 창간호에서 황명선 논산시장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한마음 글마실 어르신 기자단은 지난해 ‘할매 기자단’이란 이름으로 5편의 유튜브 영상에도 출현했다. 영상에는 한글대학 어르신들의 공부하는 이야기부터 돈암서원, 선샤인랜드 등 지역 관광명소를 직접 취재하는 내용이 담겼다. 윤 할머니는 “2017년도부터 한글대학에서 공부했다. 애들 다 키우고 집에 혼자 있으니까, 밭의 풀 말고는 나를 기다리는 게 없었다. 한글을 배워 내 이름 쓸 수 있게 된 것도 좋지만, 선생님이 오셔서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고 마을 사람들과 모여 사는 이야기 나누는 것이 참 좋다”고 말했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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